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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6>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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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6>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입력
2003.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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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11일 토요일 새벽 서울 마포구 신민당 당사에 무장경찰이 난입, 9일부터 4층 강당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근로자 172명을 무자비하게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부상한 것은 물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사복경찰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 나갔으며 황낙주(黃洛周) 원내총무와 박권흠(朴權欽) 대변인 등이 경찰 곤봉에 어깨와 얼굴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또 농성 중이던 김경숙(金景淑·21)씨가 사망했다. 전국섬유노조 YH무역 지부(YH노조) 조직부 차장이었던 김씨는 스스로 왼쪽 팔목 동맥을 자르고 4층 창문을 통해 투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극한의 대결을 벌이게 되고 결국 'YH사건'은 '10·26사태'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된다.66년 10명의 종업원으로 출발한 가발 공장 YH(사장 장용호)는 4년만에 수출 100만달러, 종업원 4,000명의 국내 최대 가발 생산업체인 YH무역으로 성장했다. 70년 9월 장 사장은 친척을 국내 사장에 앉히고 자신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호텔과 백화점 등을 경영했고 이 과정에서 YH무역의 많은 자본이 해외로 유출됐다. YH무역은 무리한 사세 확장과 자본 유출로 75년부터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 대부분의 작업과정이 도급제로 전환되면서 종업원들은 감원과 감봉을 강요 당했다. 동일방직 원풍모방과 함께 섬유업계 3대 민주노조로 불린 YH노조가 설립(5월 24일)된 시기가 이 때였다. 79년 초 제2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회사는 3월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고 근로자들을 내몰았다. 그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뭉쳐 회사 정상화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8월 9일 아침 YH무역 근로자들은 신민당사로 난입했다.

당국은 이와 관련 YH노조 지부장 최순영(崔順永·당시 27세·현 부천가정법률상담소 소장)씨, 부지부장 권순갑(權順甲·당시 25세·현 동방기획 대표)씨, 사무장 박태연(朴泰連·당시 25세·현 부천여성근로자복지센터 소장)씨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면서 "불순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문익환 목사, 이문영(李文永) 교수, 인명진(印名鎭)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서경석(徐京錫) 한국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시인 고은(高銀)씨 등 5명을 '배후 불순 세력'으로 지목해 함께 구속했다.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의원은 이철승(李哲承) 의원과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재적대의원(751명)의 과반수(376표)를 2표 넘기면서 총재에 선출됐다. '선명 야당'과 '민주 회복'을 기치로 내건 김영삼 총재는 6월 11일 첫 외신기자클럽 연설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포함한 북한의 책임 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다. 안보를 위해서는 민주회복이 선행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여당인 공화당과 유정회의 반박에도 불구, 6월 18일 북한 부주석 김일(金一)은 "김 총재의 소신은 긍정적인 제의로 이를 환영한다"는 담화로 화답했다.

YH무역 근로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계기로 김 총재 체제와 박정희 정권은 정면대결을 시작한다. 당시 신민당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농성 현장을 취재했던 이왕종(李汪鍾·67·전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씨의 설명. "김 총재의 외신기자클럽 연설과 북한 김일 부주석의 화답은 안보를 근간으로 한 유신체제에 야당과 북한이 공동전선을 펴며 반발하는 형국이 됐고 '박 대통령이 김 총재에게 한 방 맞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탐색전에 불과했다. YH무역 근로자들이 불시에 신민당사로 들어왔을 때 김 총재는 4층 강당을 농성장으로 제공했다. 근로자들이 야당을 찾아간 데 대해 불쾌감을 가졌던 박 대통령은 김 총재가 그들을 보호하면서 '내가 해결해 주겠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여러분을 당사에서 끌어내지 못한다'고 말한 대목에 더욱 분노했던 듯하다. 김 총재는 11일 새벽 사복경찰들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나오면서 '박정희가 이렇게 시키더냐'고 호통을 쳤다. 김 총재는 강제로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져 곧바로 상도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월요일인 13일 신민당 지구당위원장 3명의 이름으로 '김영삼 총재 업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제출됐다. 5·30 전당대회 대의원 751명 가운데 5명이 당원 자격에 문제가 있으므로 2표 차이로 당선된 총재선출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9월 8일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며 정운갑(鄭雲甲) 전당대회의장을 총재직무대행자로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9월 말 김 총재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여당인 공화당과 유정회는 10월 4일 국회 별관 여당 의원총회장에서 비밀리에 김 총재 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16, 17일 부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시위가 발생하자 1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단 병력이 투입됐다. 계엄군의 난폭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마산쪽으로 확산됐고, 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내려졌다. 부마(釜馬)사태가 시작된 지 10일만인 10월 26일 저녁 박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당시 YH노조 사무장 박태연씨

대구에서 공장근로자로 일하다 73년부터 YH에서 봉제과 미싱사로 일했다. 공장과 붙어있는 기숙사를 나와 정문으로 출근할 때면 YH노조 설립 당시 해고된 동료들이 유인물을 나눠주었는데 우리의 출근을 호위(?)하던 남자 직원들이 즉각 그것을 수거해 갔다. 회사는 "용마산(회사 뒷산)에서 빨갱이가 내려와 삐라를 뿌리고 있다"며 읽어보지도 못하게 했다.

어느날 유인물을 2장을 받아 1장을 숨겨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펴보니 '노동조합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이 씌어 있었다. 빨갱이 이야기가 아니라 노동3권, 8시간 노동, 월차휴가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노조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는 그것이 성경의 길임을 믿었다. 노조에 가입, 76년부터 사무장을 맡았다.

79년 제2차 오일쇼크는 우리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회사는 일방적으로 문을 닫겠다고 발표했다. 기숙사에서 농성을 시작했으나 언론과 여론은 침묵했다. 회사측은 폭력배를 동원해 우리를 해산하려 들었다. 새로운 농성장소를 논의했다. 회사와 직접 연관이 있는 조흥은행(YH 채권은행) 노동부(체불임금 및 노동3권) 미대사관(YH 사장의 해외 재산도피)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으나 장기 농성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여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 당사,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을 검토했다. 문익환 목사, 이우정 교수 등과 상의한 결과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답을 얻었다.

8월 8일 오후 회사는 폭력배를 동원해 YH무역 농성장의 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350여명 농성자 가운데 노조간부 중심으로 삼삼오오 5분 간격으로 빠져나갔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마포 신민당사 주변 골목에서 만났다. 오전 9시 당사 문을 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들어갔다. "도움을 청하려 왔다"고 소리치자 직원이 어딘가 전화를 걸더니 4층 강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모두 187명이었다. 석간 신문에 우리의 일이 비로소 보도됐다. 오후 3시쯤 김 총재가 4층 농성장에 나타났다. 그는 "구자춘 내무장관에게 연락했다. 잘 해결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여러분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했다. 기대를 갖고 다시 머리띠를 조였다.

우리의 일이 보도되자 당시 노동운동이 치열했던 해태제과 노조원들과 용달차협회 회원들이 신민당사로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분위기가 긴박해지고 있었다. 한 국회의원이 농성장에 들러 "당에서 해결해 줄 테니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오후7시쯤 다른 의원이 올라와 "경찰이 여러분을 끌어내려고 한다. 사태가 심각하다.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전태일 선배 이야기를 하며 간부들만 남아 감옥에 가기로 하고 농성을 풀기로 결정했다. '농성 종결대회'가 열렸다. "언제 다시 볼 줄 모르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서로 마지막 인사를 하자"고 했다. 농성장은 일순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밤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멀리서 당사를 포위했던 경찰이 당사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농성 종결 결정은 무산됐다. 일부 동료들은 창문 밖으로 음료수 병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고, 그 과정에서 7∼8명의 동료가 실신했다. 그 중 김경숙 동지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에게 업혀 앰뷸런스에 옮겨지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고,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농성에 합류했다.

마이크를 잡고 "진정하라, 진정하라"고 외치는 순간 강당 문이 열리며 김 총재가 들어섰다. 총재는 우리가 던지는 병을 맞아가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내 허락 없이는 경찰이 당사에 들어오지 못한다. 내가 책임지고 경찰을 물러가게 하겠다"고 말했다. 김 총재가 나간 뒤 경찰이 물러갔다.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고 창문에 불침번들을 세운 뒤 불을 껐다. 김경숙 동지는 창문에서 불침번과 잠시 얘기를 나누다 내 옆에 누웠다.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절규와 비명 속에 잠이 깼을 때 경찰은 우리를 무차별 구타하며 강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벽 2시쯤이었다. 모두 태능경찰서로 끌려갔다. 조합원들 모두가 자신이 주모자라고 우기니 경찰이 조서를 받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경찰은 나에게 계속 김경숙 동지의 행적을 캐물었다. 화장실에서 '여공 1명 사망'이란 기사가 실린 신문 조각을 보았다. 비로소 그의 사망을 알았다. "왜 김경숙이를 죽였냐"고 울부짖자 경찰은 그의 사망을 확인해 주며 새로운 추궁을 시작했다. "어떻게 그를 사주했느냐. 송곳으로 찔러 투신을 강요했느냐. 병조각을 건네주어 팔을 긋게 만들었느냐"며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구속 중 10·26 소식을 들었고, 12월 1일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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