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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놀고 순식간 해산 신나는 "깜짝쇼"/새문화 코드로 뜬 "플래시몹" "매트릭스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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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놀고 순식간 해산 신나는 "깜짝쇼"/새문화 코드로 뜬 "플래시몹" "매트릭스 놀이"

입력
2003.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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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저녁, 서울 인사동 북쪽 입구에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어림짐작으로 400여명. 마스크 쓴 사람들이 나눠준 종이쪽지를 들고 주변을 서성이던 이들은 휴대폰 알람이 6시 13분을 알리자, 두 명씩 마주보고 손뼉을 치며 긴 터널을 만들었다. 이어지는 추억 속의 놀이.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8분쯤 지났을까, 풍선을 단 선두를 따라 줄지어 인간터널을 통과하며 신나게 놀던 이들은 갑자기 놀이를 멈추고 뿔뿔이 흩어졌다. 시위대인줄 알고 바짝 긴장해 있던 경찰과 행인들을 뒤로 한 채.

같은 날 오후 3시, 서울 삼성역 6번 출구 앞. 주변을 서성이던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 차림의 젊은이 50여명이 대열을 지어 섰다.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이들은 밀레니엄 광장을 거쳐 코엑스몰 정문으로 이동, 퍼포먼스를 펼쳤다. '매트릭스2―리로디드'에 나온 네오와 스미스 요원들의 대결에 이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한 장면과 흡사해 화제가 된 '매트릭스3―레볼루션'의 네오와 스미스의 빗속 결투가 재연됐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카메라폰 셔터 소리와 폭소, 그리고 간간이 박수가 터져 나오면서 30분간의 깜짝쇼가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의 반정부 투쟁 구호와 2년 8개월만에 등장한 화염병이 서울 도심을 뒤덮은 9일 오후. 요즘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플래시 몹'(Flash Mob)과 영화 '매트릭스'의 주요 장면들을 흉내 낸 '매트릭스 놀이'가 펼쳐진 서울의 또 다른 거리 풍경이다. 두 놀이는 진행 방식과 목적 등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심지어 각 놀이를 즐기는 이들은 서로가 '동류(同類)'로 묶이는데 심한 불쾌감을 드러낼 정도로 거리를 둔다. 그러나 두 놀이 모두 가상공간에서 의기투합한 이들이 현실공간인 거리로 뛰쳐나와 깜짝쇼를 펼치며 순간의 짜릿함을 즐긴다는 점에서, 첨단 테크놀로지에 발칙한 상상력을 결합한 신종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의 인간)의 등장이라 부를만하다.

플래시 몹이 도대체 뭐야?

올 6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백화점에 100여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일제히 "우리가 타고 놀 '사랑의 양탄자'를 달라"고 주문했다. 이들은 양탄자 하나를 골라 난상토론을 벌이더니 얼이 빠진 점원을 남겨놓고 썰물처럼 매장을 빠져나갔다. 문화산업 종사자로만 알려진 빌이라는 남성이 기획했다는 이 깜짝쇼는 야밤에 호텔 로비에서 15초간 미친 듯 박수치기, 자연사박물관에서 동물 소리 흉내내기로 이어졌다.

서로를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휴대폰 이메일 등을 통해 약속 장소에 모여 몇 분간 황당한 행동을 한 뒤 순식간에 흩어지는 이 기괴한 현상을 두고 '플래시 몹'(플몹)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플몹은 특정 웹 사이트의 사용자가 일시에 폭증하는 현상을 뜻하는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인터넷, 휴대폰으로 무장한 군중을 일컫는 '스마트 몹'(Smart Mob)의 합성어. 플몹은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로 퍼졌고, 8월 국내에 상륙했다.

8월 31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50여명이 모여 행인들에게 고개 숙여 "안녕하세요" "행복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것을 시작으로, 9월20일에는 명동에서 "외계인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일제히 바닥에 드러눕는 깜짝쇼가 펼쳐졌고, 10월18일 밤 강남 코엑스 광장에서는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2002 월드컵 응원이 재연됐다. 25일 오후에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분수대 앞에서 "반갑습니다, 시드니" 등 구호와 함께 "다같이 돌자 지구 한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지구 한바퀴…"라는 노래가 불려졌다. 이 행사는 세계 각국의 '플래시 모버'들이 국제표준시 오전 9시에 맞춰 일제히 '거행'한 일명 '글로벌 플몹'으로, 부산 대구 등 지방 6개 도시에서도 동시에 열렸다. 9일 행사는 국내에서 다섯번째 열린 플몹.

다음 카페에 따르면 가장 먼저 결성된 서울 플몹은 회원수가 1만3,000여명에 달하고, 전국 20여곳에 플몹 동호회가 생겨나 지역 단위로 크고 작은 플몹을 벌이고 있다.

왜냐고 묻지마! 그냥 즐겨

하워드 라인골드가 개념화한 '스마트 몹'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새로운 힘이라는 뜻이 담겨있지만, 플몹은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상업적 연관을 거부하고 행위 자체만을 즐기는 '순수 유희'다. "목적을 두지 않는 것이 목적이고, 의미가 없다는 것 자체가 의미인 놀이"라는 것이다. 플몹 참가자들에게 "왜?"라고 물어봐야 "그냥"이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플몹의 진행 방식은 이렇다. 플몹 날짜가 정해지면 신청자를 받고, 거사일(?) 하루 이틀 전 신청자에게만 이메일로 장소와 시각을 통보한다. 플몹의 내용은 운영진 외에는 'D데이 H아워'까지 비밀에 부쳐진다. 참가자들은 당일 현장에서 '모버레이터'로 불리는 진행 요원이 나눠준 '몹 지시서'에 분 단위로 명시된 행동 요령을 따라 놀이를 펼친다.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가투'를 연상케하는 이런 비밀지령 방식은 혹 있을지 모르는 '불순한 의도'의 개입을 막고, 그날 벌어질 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놀이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무리 지어 해산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금한다' 등 몇 가지 기본 수칙도 정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익명성 지키기'란 수칙이다. 참가자들은 서로 신상에 관해 묻지 않고, 타인의 물음, 특히 언론의 취재에 절대 응하지 말도록 돼있다. 불필요한 해석과 평가를 거부하고 놀이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의도다.

이 신종놀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유희의 순수성과 기발한 상상력에 주목하면서 "내 뜻이, 내 주장이 옳다고 너도 나도 소리치는 의미 과잉의 시대를 유머러스하게 비켜가는 휘발성 무의미의 놀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이 '즐기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철없는 행동으로 비치기도 한다. 10월18일 3차 플몹을 지켜본 코엑스의 한 경비원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공공장소를 허락 없이 점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혹시 안전사고라고 일어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영화, 관람을 넘어 즐기기로

매트릭스 놀이는 말 그대로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들을 따라 하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즐기는 놀이다. 매트릭스 놀이는 7월 일본에서 플몹 형식으로 시작됐지만, 국내에 들어와서는 동호회를 기반으로 철저한 사전 기획과 연습을 동반한 퍼포먼스로 발전했다. 몇몇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플몹과 비슷하게 현장에서 나눠준 행동지침서를 따르지만, 홈페이지에 장소와 시간이 공개돼 복장만 갖추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진행도 공연 형태로 이뤄진다는 점이 플몹과는 확연히 다르다. 9일 행사에 복제 스미스 요원으로 참가한 주부 이유경(39)씨는 "인근 벼룩시장에 장 보러 나왔다가 지나는 대학생에게 이런 행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검은 옷에 검은 부츠를 사 입고 왔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뿔뿔이 흩어지는 플몹과 달리, '관객'과의 기념 촬영 등 뒤풀이를 즐긴다.

'매트릭스 인 서울' 동호회와 함께 이번 행사를 기획한 케이블 채널 수퍼액션의 최인희씨는 "이 놀이는 플몹보다는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 복장을 하고 파티를 즐기는 '코스프레'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혹자는 80년대 한때 유행한 '지하철 람보 놀이'의 계승이라는 재미있는 해석도 내놓기도 한다. 소마라는 ID를 쓰는 '매트릭스 인 서울' 대표는 "행사 장소 관리자에게 사전 승낙을 얻고 진행요원을 사전에 철저히 훈련시켜 안전사고를 방지하려 애쓴다"면서 "일부 진행방식이 비슷하다고 플몹과 연관짓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매트릭스 놀이는 특정 영화를 흉내 낸다는 점에서 상업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더구나 9일 행사는 '매트릭스3―레볼루션'이 개봉된 직후 이뤄져 그런 우려를 짙게 했다. 이 때문에 플몹 카페측이 행사 홍보에 플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데 대해 거세게 항의, 매트릭스 동호회 운영진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날 행사를 지켜본 대학생 김지현(18)씨도 "플몹에 참여한 적이 없지만 순수하고 신선하게 느껴져 관심이 많지만, 매트릭스 놀이는 영화 홍보의 일환으로 보여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즐거운 반란은 계속된다?

전문가들은 플몹이 타인에게 피해 주는 행동 금지라는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매트릭스 놀이가 특정 영화 홍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 다양한 '영화 놀이'로 외연을 넓혀간다면, 새로운 놀이 문화로 정착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최근 플몹의 탄생지인 미국에서 상업화의 손길이 뻗치며 열풍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것을 보면, 반짝 유행으로 그칠 가능성도 크다. 그렇더라도 네티즌들의 즐거운 반란은 계속되지 않을까.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21세기형 '호모 루덴스'들이 또 어떤 기발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지 기대해 봄 직하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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