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시론]태종에게서 배워야 한다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시론]태종에게서 배워야 한다면…

입력
2003.11.12 00:00
0 0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주 조선왕조의 통치기반을 성공적으로 다져 위대한 세종시대가 오게 한 태종의 역할을 자임하겠다고 말했다. 승부사 기질이 뛰어난 태종이 조선왕조 최고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인 만큼, 순발력이 강하고 정면돌파를 선호하는 노 대통령이 태종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같은 발언이 대선자금 수사라는 판도라 상자를 여는 일과 관련된 심경을 에둘러 피력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르고 있어, 역사의 맥락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태종의 성공은 인적 청산과 제도의 뒷받침을 이룩해낸 추진력에서 비롯되었다. 잠재적인 정적까지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왕권이 신권(臣權)과 백성의 권리 위에 확실하게 군림할 수 있게 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문제는 그 성공이 태종의 당대에 그쳤다는데 있다. 그와 비견될만한 사례가 이후 조선왕조사에서 반복되지 않은 것이다. 왕권과 신권이 힘을 겨루는 군신공치(君臣共治)체제가 조선 후반기에 접어들어 오히려 신권이 강해지는 형태로 바뀌고, 나중에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시대까지 열린다. 상대 당파의 인적청산을 둘러싼 당파 간에 끝없는 정치보복이 당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 정치관행은 대한민국 건국 뒤에도 계속돼 전 정권의 부패 등 과거를 단죄하는 일에 매달려 싸우다가 미래로 향해야 할 나라의 에너지를 소모해온 것이 한국정치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적청산을 전제로 하는 이번 대선자금 수사는 과거정권의 단죄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원초적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노 대통령이 얘기했듯이, 구태와 잘못된 관행을 깨끗이 청산할 수 있는 계기가 순조롭게 오겠느냐는 것이다.

대선자금의 진정한 문제는 사실 어느 쪽이 검은 돈을 더 받고 덜 받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돈이 없으면 정치가 불가능한 이 나라 천민정치 풍토의 문제이고, 그 정치풍토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돈이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게끔 한 천민자본주의 풍조에서 비롯됐다는 데 근본문제가 있는 것이다.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다 보니 경제성장의 부산물로 배금주의 사상, 천민자본주의 풍조가 잉태된 것이어서 우리 모두가 책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역사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통해 여야의 대선자금 전모를 밝히고 정치개혁을 압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문제의 천민문화까지 바로 잡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세 야당이 검찰수사를 견제하기 위해 특검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검찰과 야당이 대치하는 국면까지 열리고 있다. 총선전략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과거의 단죄 때처럼 정국이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그러니 수사에 의한 정면돌파 방식보다 제도개혁 쪽으로 역점과 비중을 돌려 미래지향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고 순리적이다. 천민정치에 공동책임이 있는 정부, 정치인, 유권자 등 당사자 모두가 참여해서 타협과 합의 속에서 해법을 찾자는 것이다. 불법자금의 정치권 유입을 차단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치개혁법과 완전선거공영제 등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천민 풍토를 극복하는 교육정책까지 준비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검은 돈의 정치를 졸업하자는 국민의 여망과 지지가 있고, 정치권의 자성분위기가 팽배한 만큼 여야가 깨끗한 정치를 위한 제도마련의 호기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21세기에 15세기의 인물 태종에게서 배우기로 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정치기법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한 그의 지혜 쪽이 아닐까?

오 인 환 전 공보처장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