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70여만 명의 수험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렀다. 고교 3년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12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시험지에 쏟아 부었을 것이다. 단판승부를 하는 생존경쟁의 장에서 가슴을 죄는 이들은 수험생만이 아니다. 교회나 사찰에서, 혹은 수험장 교문 밖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입시철이면 나는 50여 년 전 중학입학을 포기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입시에 합격한 광주 남중의 등록 마감일이었다. 온 동네를 팔방으로 뛰어다니시던 어머니가 드디어 등록금을 챙겨주셨다. 돈을 싼 전대를 허리에 두르고 그 위로 웃옷을 걸쳤다. 등록금 납부처인 조흥은행 광주지점으로 갔다. 당시 내가 살던 전남 광산군 대촌면 시골동네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20여㎞를 오전 내내 걸었다.
점심때쯤 은행에 도착하여 벤치에 앉았다. 내 생전에 처음 만져본 거금을 선뜻 창구에 내주기 아쉬웠다. 여름에 벼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갚겠다고 빌린 고리대금이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광주로 진학하면 시골에 남은 홀어머니와 연약한 누나만이 힘든 농사를 지어야 한다. 못 먹고 일만 고되어서 밤이면 끙끙 앓는 어머니의 가련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병충해가 많아 흉년이 들면 빚을 갚지 못하고 이자에 이자가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빚이 늘어날 것이었다. 얼마 전 빚 때문에 야밤 도주한 앞 골목의 수철이네가 광주 어디에선가 거지가 되었다지 않던가.
"은행 마감 시간이니 남중학교 등록에 차질이 없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를 재촉했다. 다시 한번 등록금을 낼까말까 망설였다. 곧 은행의 철문이 닫혔다. 나는 후문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피곤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결정이 잘한 것일까. 적은 돈을 아끼려다 약속된 미래를 팽개친 것이 아닐까. 큰일을 한 사람들은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데, 내가 너무 소심한 것도 같았다. 허리에 찬 전대는 무겁고 부담스러웠다. 누가 돈을 빼앗으려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밤길은 깜깜하고 어두웠으며 무서웠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여 어머니께 돈을 돌려 드렸다. 건너 마을의 인가도 없는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농사를 돕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말이 없이 안타깝고 착잡한 표정이었다. 한참 후에 눈물을 감추지 못한 어머니를 붙들고 나도 따라서 울었다. 홀어머니가 불쌍했고, 중학교 교복이 아쉬웠으며 가난이 서러웠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고학으로, 대학은 대전에서 장학금으로 마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정년을 앞둔 오늘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내 학업의 굴곡이고 시련이었다.
정 일 남 KIST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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