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가 자산이 2조원 넘는 41개 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치자금에 대한 기업인 인식' 조사 결과는 정치권과 기업인의 발상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일깨운다. 기업이 정치자금을 제공한 가장 큰 이유는 불이익을 막자는 것으로 전체의 63%에 달했다. 반면 반대 급부를 기대한 것은 3%에 불과했다. 기업들의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어느 정도 가미됐겠지만, 권력이 기업 경영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특히 검찰의 수사로 해당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향후 정치권의 부당한 자금 지원 요청에 절반 가까이가 계속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힌 점은 주목된다. 정경유착의 관행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그래서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기업 스스로가 인정한 셈이다. 이는 또 정치자금에 대한 개혁이 바람직하지만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최근 한 여론조사의 결과와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안타깝다.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개혁이 결국은 용두사미로 끝났던 과거의 결과가 이를 웅변한다. 정치권과 재계가 위기 국면을 '말로만 개혁'으로 넘겼고, 실망과 분노를 거듭한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번 상의 조사를 보면 정치자금 성격은 보험성이 강하다. 기업경영을 권력에 의지하려는 극심한 도덕적 해이를 기업 스스로가 자초하고 있다. 이는 마치 돈을 받고 안심하고 장사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조직 폭력배의 행태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입으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정반대 행동을 정치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번 조사가 시사하는 의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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