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기구한 선생님들이 있을까.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멀리서부터 칠판을 메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 산을 오르는 일단의 젊은이들을 보여준다. '구구단 배우세요! 글 가르쳐 드려요!'라고 호객꾼처럼 떠들며 칠판을 등에 메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대에서 양국 국경분쟁을 피해가며 험난한 계곡을 오르내리는 쿠르드족 선생님들이다. 이들은 제자를 찾아 헬리콥터가 총탄을 퍼붓는 전쟁터까지 누비며 밀수품 장물을 운반하는 아이들도 마다 하지 않는다.'칠판'은 이란 영화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딸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작품. 아버지 ('사랑의 시간','가베')와 어머니 마르지예 메쉬키니('내가 여자가 된 날')의 시적 재능은 물론 사미라만의 개성적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미라 감독은 칠판을 짊어지고 낮은 곳에 임한 선생들뿐 아니라, 구구단도 모국어 철자도 익힐 겨를이 없는 이란 서민들의 삶 속을 다부지게 파고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전쟁의 참화로 신음하는 이란의 실상만이 아니다.
부모의 시적 통찰과 유머를 이어받은 사미라 감독은 칠판의 다양한 용도를 통해 이란의 스산한 삶을 따스하게 읽어낸다. 여기서 칠판은 선을 보는 남녀를 가르는 커튼이자(쿠르드족은 여전히 남녀가 유별하다), 피란길에서 차린 신방을 가리는 대문이자, 다리 부러진 아이의 부목이며, 환자를 나르는 들 것이 된다.
수업이래야 학생들이 밀수품을 몰래 나르는 틈틈이 허겁지겁 자기 이름의 철자를 배우는 게 전부다. 카메라는 숨길 곳 한 군데 없는 근원적인 곤경을 들춰보인다. 그렇다고 분필 한 자루 없는 헐벗음이 영화를 궁핍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궁핍한 선생과 그보다 더 궁핍한 제자들의 살림살이엔 묘한 광채가 빛난다. 지뢰가 묻힌 곳을 피해 다니며 난민 행렬 속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스무 살 때인 2000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에 올랐고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도저히 20세 때 만든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깊이다. 14일 개봉.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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