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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판소리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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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판소리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부쳐

입력
2003.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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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국악학자 이혜구 선생은 '심청전'의 '심청 인당수 빠지는 대목'을 판소리의 백미로 꼽는다. 선생의 글을 잠깐 인용하자. "도사공의 '어서 물에 들라'는 성화같은 재촉, 심청의 '아이고'를 길게 외치고 '여보시오 선인님네 도화동이 어디만큼이나 있소'라고 애조를 띤 말 반 소리 반으로 묻는 말, 풍랑이 뱃전에 부딪치는 듯, 소리의 밑을 깔고 있는 북의 트레몰로, 이따금 소리 끝을 맺어주는 북의 '딱 다다 닥 딱' 소리와 추임새의 '핫' 소리 곧 이어서 소리 시작하라는 북의 '쿵' 소리, 이 모두가 한데 얽혀 극적으로 흥분을 부추긴다."판소리는 이처럼 손장단의 변화, 말과 소리와 북의 관계 등 극적 효과가 뛰어난 음악이다. 더욱이 북 한가지 반주로 얻어낸 큰 효과는 놀라울 따름이다. 아구성(양볼과 어금니 사이로 내는 울림이 풍부한 소리), 비성(콧소리), 세성(가성에다 흉성을 약간 섞어 가늘게 내는 소리) 등 낼 수 있는 목소리도 다양하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200∼300% 발산한다. 우리 판소리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것은 분명 이런 느낌이 언어와 국경을 넘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의 현재를 보면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판소리는 대중에게서 멀어져 '석고화'했다. 판소리는 원래 시대를 반영하는 변화무쌍한 음악이었다. 민중의 문화에서 양반 대갓집 사랑방 대청마루를 지나 다시 민중 속으로 다가가면서 사설과 소리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조선 후기 정가풍의 소리와 점잖은 사설로 대변되는 양반사대부나 부호들을 주된 향수층으로 삼던 판소리가 대중에게 다가선 것은 1902년 왕실전용극장의 성격을 띤 '협률사'의 등장이었다. 대중을 상대하다 보니 소리도 슬픈 계면조가 많이 들어갔고, 설정도 시대에 맞게 변했다.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김창룡 등 이름이 알려진 명창(근대오명창)이 이 시기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일제시대 100만장 이상의 음반 발매를 기록한 임방울이나 이화중선 등이 이들의 후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한 노래를 하다 보니 인기 있는 대목만 부르는 '토막소리'가 유행해 판소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기도 했다.

판소리의 '석고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1960년대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지정이 한 요인이 된 감도 없지 않다. 판소리의 보존에는 큰 공헌을 했지만 후예들이 소리를 짜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계보가 고정되면서 다양한 스승에게 배우기도 힘들어졌다. '독공'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만큼 여유가 없어진 세상도 한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판소리를 고전으로 느낄 뿐 옛날 사람처럼 이야기에 눈물지을 수 있는 현재성은 사라졌다. 요즘 들어 창작 판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예술성 측면에서는 미흡한 상태다.

흔히 판소리는 민족음악의 꽃이라고 한다. 민요부터 무가, 범패 등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 한 작곡가의 창작품이 아니라 수백년을 내려오며 여러 명창들이 대목과 더늠을 축적한 공동창작물이다. 그런 생명력이 살아나야만 판소리는 다시 대중 곁으로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최 난 경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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