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리 마을 분들에게 알립니다"옛 사람들이 남녀는 유별하여 비록 남매 사이라 하여도 일곱 살이 넘으면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옛날 계강자(季康子·중국 노나라의 승상)가 그 종조모(從祖母)를 찾아가 문을 열고 함께 대화했으나 모두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고 하니 이를 공자(孔子)가 듣고 '참으로 옳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자고(自古)로 아내를 맞이할 때는 반드시 이성(異姓)을 택해야 하고, 첩을 취하더라도 그 성을 물어본 연후에 하니 모두가 수치스러움을 피하고자 함이다. 오직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로 각자가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남자는 하고 싶은 대로 처신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만일 이를 어기는 경우라면 엄히 벌하는 것이 선왕의 법도와 법전에 실려 있다. 지금 세상이 복잡하고 사람들이 예절을 모른다지만, 오직 우리 선비들이 근근히 보존하는 것은 다만 선왕의 법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거주하는 유치극(柳致克)이 자신의 친인척이 많은 것을 믿어 선왕의 법을 무시하고 그의 종고모(아버지의 사촌 누이) 유씨 부인과 기탄 없는 행동을 하니 이를 차마 참을 수 있는가?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것이며 마을에 예절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를 징벌하지 않는다면 지금 한 동네가 모두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질 것이니 조선 사람으로서 금수의 땅에 살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제 피가 끓어 참을 수 없어 통문(通文)을 돌린다. 이 달 13일 마을 회의가 열리는데 유치극과, 아울러 통정하는 과부 유씨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내 정풍(正風)으로 교화함이 천만 다행일 것이다. 만일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로 여기고 함께 처벌할 것이다. 기해년 9월6일 임충호 알림."
죽음으로 소문에 맞서다
한 장의 통문이 돌면서 조용한 마을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어쩜 그런 일이!" 마을에는 소문이 번져 나갔다. "남편이 죽은 지 3년이 채 되지도 않은, 아주 지체가 높은 양반 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지렁이 농사꾼도 아닌 반가(班家)의 부녀자가 그런 음행을 일삼다니 세상이 망했도다."
혀를 끌끌 차며 임충호의 통문에 따라 그런 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야 된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설마 유씨 부인이 그럴 리 있겠소"라며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미 유씨 부인은 음행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소문은 금세 유씨 부인의 귀에 들어갔다. 치욕에 떨던 그녀는 곧바로 임충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한 손에 낫을 든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임충호를 죽이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임충호는 부단리에서 가장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었으니 쉽게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씨 부인의 한바탕 소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임씨 집안 여자들 역시 뛰어나와 낫을 들고 소리치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소문을 낸 주인공 임충호는 이미 상황을 감지하고 서울로 도주한 상태였다.
망연자실한 유씨 부인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체념하고 마음을 다잡은 줄 알았다. 그런데 13일 새벽 유씨 부인의 열 두 살 난 수양아들 한옥동은 잠결에 무슨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일어나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가 배를 부여잡고 방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방 한 쪽에는 조그마한 그릇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옥동이는 이웃에 사는 외삼촌 유덕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급히 달려온 유덕수는 그릇에 남아 있던 간수를 맛본 후 쌀뜨물과 녹두 갈아낸 물을 준비해 얼굴빛이 누래져 사색이 완연한 유씨 부인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반가의 부녀이니 검시를 면해 주소서
유덕수와 옥동의 친부(親父) 한사석 등은 유씨 부인을 수습한 후 관아에 그 죽음을 알렸다.
"사또, 저의 재종 형수님은 청상(靑孀)으로 늙어 마음이 빙설(氷雪)과 같았습니다. 한 마리의 풀벌레와 같이 고고하였으며 생전에 지병이 없었으나 지난 13일 이른 아침 형수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달려 가 보았더니 과연 이미 운명했습니다. 제 아들 한옥동의 양외숙(養外叔)인 유덕수가 말하기를 '옥동이 와서는 어머니가 복통으로 괴로워하며 울고 있다'고 해서 급히 함께 가서 등잔을 들고 사방을 살펴보니 간수를 졸인 그릇 한 개가 깔개 위 베개 근처에 있거늘 심히 괴이하고 의심쩍어 그릇을 기울여 맛을 보니 과연 간수를 졸이고 남은 찌꺼기였습니다. 간수를 마시고 어찌 목숨이 온전하길 바라겠는가 하면서도 손발의 맥을 짚어보았더니 약간 뛰는 듯해 깨어나길 바라며 쌀뜨물을 여러 번 입안에 흘려 넣었으나 몇 숟가락 넘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의 사연으로 말하자면 이 마을에 사는 임충호가 계략을 써서 근거 없는 소문과 애매한 말을 통문으로 발송해 퍼뜨리니 이를 듣고 괴롭고 모욕을 느낀 형수께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간수를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더러 피고 임충호는 도주한 상태였으므로 먼저 출상(出喪)을 하고 나중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그리한 후 고발한 것입니다. 이미 염하여 출빈(出殯)한 데다가 또 반가의 부녀(婦女)이니 검시는 특별히 면해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라나이다."
조선시대 반가의 부녀자들에게 주어졌던 면검(免檢) 권리를 요청한 것이었다. 검시를 할 경우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온 몸이 발가벗겨져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상놈 경우는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누가 내 원수를 갚아줄까
한편 자진(自盡)한 유씨 부인의 방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고 애매한 소문 때문에 죽음을 택한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비장한 내용과 함께 시집 간 딸과 사위를 보지 못하고 가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유서를 쓰려고 하니 홍광취지(紅光聚之·눈자위가 붉어짐)하여 눈물이 솟아 (눈)동자를 가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 몸이 죽는 것은 슬프지 아니하나 악명(惡名)을 입고 부명(賦命·타고난 운명)으로 죽게 되니 어찌 절통하지 아니하리오. 또한 모녀(母女) 상봉(相逢)할까 하였더니 그도 못하고 홍(洪) 서방도 다시 못보고 죽으니 어찌 구천지하(九天地下)에선들 눈을 감으리오. 남에게 적원(積怨)한 바 없건만 삼년상을 지내지 못하고 슬픈 누명을 쓰고 죽으니 나의 원수 누가 갚아 줄까? 살다가 누명을 쓰고 끝을 여미지 못하고 이 지경을 당하니 어찌 절도(絶倒)하지 않겠는가? 나의 원수를 갚아 주옵소서. 홍 서방에게 술 두어 잔 받아주지도 못하고 세상을 이별하니 절통(切痛)하지 않겠는가.'
유서를 읽고 난 서산군수 김홍규는 서울로 도주하였다는 임충호을 당장 체포해 대령하도록 명했다. "임충호란 자는 사족(士族)으로 독서하는 선비인데 이와 같은 통문을 돌리고 무근(無根)한 소문을 퍼뜨려 화근을 만들었으니 이른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어찌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임충호란 자가 아무 문제도 없는 부인을 원귀(寃鬼)로 만들었으니 유아지율(由我之律·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죄를 물어 처벌한 조선의 행형 제도)에 해당하는 것이요, 피고(被告)를 면키 어려운 것이다. 뚫린 구멍을 엿보고는 종적을 감추었으니 그 한 짓을 보면 더욱 극악하다. 따로 군의 순교를 보내어 잡아들이도록 하라."
실제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소문의 힘이 막강했음을 알게 된다. 단지 소문만으로도 마을에서 쫓겨나고, 관에 끌려가 도둑으로 취급당한 후 매를 맞고 심지어 유씨 부인처럼 자진하기에 이르렀으니 법보다 소문이 더욱 강한 구속력을 가졌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서산군수는 서울로 도망간 임충호를 잡아들이기 위해 그의 인상착의를 담은 '용파(容 )'를 작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몽타주 같은 것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얼굴과 상처'라는 뜻이지만 그림은 없고 글로 사람의 생김새 등을 묘사했다. 키와 얼굴빛, 머리 모양과 그 사람만의 특이한 생김새, 주로 얼굴이나 팔 등의 상처 혹은 뜸을 놓았던 부위 등을 기록해 포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요즘은 유전자 감식처럼 과학기술을 이용해 죽은 사람이나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용모나 병력(病歷)에 따른 상처, 혹은 문신 등이 매우 중요했다.
조선시대 수사·법의학 지침서인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에도 검시할 경우 반드시 '생전에 팔·다리가 부러졌는지, 곱사등이였는지, 조막손이나 절름발이였는지, 대머리였는지, 사마귀나 혹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병의 상처나 문신, 뜸을 뜬 자국, 옴이나 버짐, 종기나 뾰두라지 부스럼 등의 흔적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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