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던 단풍도 저물고 바람 한 자락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느낌 때문에 광릉 숲 속의 산책길에 더욱 애착이 갑니다. 하지만 이제 가는 계절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즈음에는 남쪽 바닷가로 발길을 돌려도 좋습니다.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그런 바닷가 말입니다.이런 곳엘 가면 언제나 만나는 나무가 있는데 바로 천선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와 형제지간일 정도로 아주 가까운 나무이지만 이름을 아는 이는 드뭅니다. 하긴 곁에 서 있는 나무나 풀에게도 눈길 한 번 주기 어려운 세상에 먼 바닷길에서 만난 나무에까지 마음을 주고 사는 이는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쪽 여행길에서 만나는 천선과나무는 보통 사람 키 정도 됩니다. 무화과나무 집안은 본래 고향이 주로 더운 나라여서 상록성인 것이 많지만 천선과나무는 낙엽수입니다. 하지만 한번 알고 나면 어디서나 금새 알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둥근 열매 때문이지요. 어릴 때 갖고 놀던 구슬 크기의, 검기도 하고 자줏빛이기도 한 열매 표면에는 점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무화과처럼 달지는 않아도 먹을 수는 있어서 아이들이 놀이삼아 따먹지요.
무화과처럼 천선과나무도 우리 눈에 활짝 핀 꽃이 보이지 않을 뿐, 숨어서 꽃을 피웁니다. '꽃주머니(花囊)'라고 부르는 둥근 구조 속에 꽃들이 들어 있습니다.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 있는데 암꽃과 수꽃이 각기 다르지요. 수꽃의 꽃가루가 암꽃의 암술머리에 닿아야 꽃가루받이가 되고 꽃주머니는 그대로 열매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멍이 아주 작은 주머니 속에서 꽃가루가 나와 다른 그루에 닿을까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를 즐겨 읽으시는 분은 이미 짐작하겠지만 곤충의 힘을 빌립니다. 아주 작은 벌의 일종이랍니다. 수나무의 꽃주머니가 점차 붉은 색이 되어갈 즈음, 그 속에서는 수벌이 암벌보다 먼저 어른이 돼 주머니 속을 돌아다니며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암벌과 차례로 교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행하는 원조교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수벌은 자신의 임무를 다 하고 나면 주머니 속의 바깥 세상을 한번 구경도 못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니까요. 이 즈음 주머니 속이 조금 열리고, 맑은 공기가 들어오고 나면 암벌이 완전히 깨어납니다. 때를 같이해 수꽃이 피고 날개를 펴고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암벌의 몸에 꽃가루를 묻혀 보냅니다.
여기에서 다시 삶의 갈림길이 달리집니다. 암벌이 찾아간 어린 꽃주머니가 수나무라면 암벌은 수꽃주머니 속에 들어가 쉽게 산란관을 넣어 알을 낳습니다. 아주 안락하고도 쾌적한 벌들의 양육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어른이 되기까지 주머니 속에 꽃에 들어가 조직을 먹으면서 영양분까지 공급받는 것이지요. 벌로 치면 성공이고 나무로 치면 기막힌 운명이죠.
하지만 암꽃으로 찾아가면 인생은 역전됩니다. 암꽃주머니 속은 길어서 산란관을 꽂지 못하고 벌들은 꽃가루만 전한 뒤, 그 주머니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배속에 알을 가득 담은 채 생을 마감합니다. 물론 나무는 성공적인 결실을 하겠지요.
서로 얽히어 주고받는 기막힌 시스템입니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은 사람에게도, 곤충에게도, 나무에게도 다 적용되는 말인 듯 합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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