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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비치―음탕한 계집

입력
2003.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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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워첼 자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황금가지 발행·2만2,000원

'비치(bitch)!' 이건 욕이다. 사전적 의미는 '암캐', 속어로는 '음탕한 계집'을 가리킨다. 성적 매력으로 남자 신세 망치는 여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나쁜 X', 사회의 도덕에 반하는 '공공의 적' 쯤 된다. 문제는 그들이 대부분 예쁜 여자이고, 그런데 고분고분하지 않고 좀 성깔 있게 군다는 점이다. 남자가 맘대로 휘어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독립적 존재다. '요부' '악녀' '팜므 파탈' 등 고약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워첼(35)의 '비치―음탕한 계집'은 이런 통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비치를 적극 옹호한다. 먼저 이 책의 표지(사진)를 보시라. 웃옷을 벗고 드러난 가슴을 긴 금발로 살짝 가린 채 유혹적 미소를 보내고 있는 이 여자가 바로 워첼이다. 그녀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자. 이런! 최근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야구선수 김병현이 바로 이 제스처를 했다가 규탄을 받아 팀에서 방출될 위기까지 몰렸다. 워첼은 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지독하게. "그래, 나는 비치다. 어쩔래? 이 XX들아!"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가 보기에 '비치'는 자신의 성을 이용해 해방감을 표현하는 여자다. 여성이 성적 매력을 과시하고 적극 활용하는 것은 못된 계략이 아니며, 오히려 여성성의 강렬한 표현이자 자아 실현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름다움과 광기, 그리고 젊음 때문에 오해 받고, 남성 중심 역사에 의해 조작되고 거부당한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한다. 여자들에게 정숙한 숙녀가 되라고 강요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요부에 열광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아 분열을 겪는 여자들의 고통을 말한다. 그리고 비치 동지들에게 주문한다. '당당하게, 더 많이 즐기라'고.

이 책은 비치로 낙인 찍힌 여자들의 '불행의 연대기' 이기도 하다. 비치의 원조로 꼽히는 구약성서 속 데릴라부터 힐러리 클린턴까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자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사자처럼 울부짖고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록 음악의 여성 스타들, 남자를 멋대로 주무른 스크린의 여배우들, 유독 강한 자의식과 섹스 어필 때문에 비난 받은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스트 등 이 책에 언급된 여자들은 족히 수백 명은 될 것이다. 데릴라에 대한 변호는 이런 식이다. 데릴라가 삼손을 망쳤다고? 그럼 삼손은 자유의지도 없는 얼간이였단 말이냐. 블레셋 여자 데릴라가 유대 남자 삼손을 파멸시켰다면, 그건 요새로 치면 팔레스타인 여성이 이스라엘 테러리스트에 복수한 셈 아닌가. 왜 데릴라에게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지?

잔뜩 열 받은 워첼은 억울해 하고 분노한다. 그의 말투는 거침없고 공격적이고 속사포 같다. "이제 나는 울부짖고 소리를 지르며 시동을 걸어 질주해 보려 한다"고 쓴 서문 그대로다. 이 책은 발악하듯 절규하고, 광포한 열정으로 미친 듯 내닫는다. 하버드대 졸업 후 '뉴요커' '뉴욕타임스 매거진' 등의 편집자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그는 한때 마약에 찌들고 마구잡이 섹스를 즐겼던 자신의 경험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돌아온 탕녀처럼 회개하진 않는다. 그건 그에게 구역질 나는 일이다. 뜨겁고 처절한 고백과 웅변 끝에 그는 다짐한다. "천사표는 싫다. 더 자유롭게 살겠다. 내게는 나만의 삶이 있다" 고.

이 책은 5년 전 미국에서 처음 출간돼 큰 화제가 됐으며, 여성성을 적극 강조하는 제 3세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인정 받고 있다. 분량이 600쪽이나 되지만, 책장이 휘리릭 넘어간다. 너무 강렬해서 위험한 위첼의 에너지에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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