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는 그 날도 입양을 하기위해 입국한 90여명의 미국인들을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특히 입양 희망자 가운데 흑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미국 대사관에서 노인가정이라는 이유로 입양서류를 통과시키지 않자 이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했다. 홀트는 "노인가정은 핑계에 불과하고 서류를 내주지 않는 진짜 이유는 인종차별일 겁니다"라며 툴툴거리면서 대사관으로 향했고 나는 입양희망자들과 함께 입국한 언론사 관계자들을 대동해 나갔다.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우리는 입양사무소에서 다시 만났는데 홀트는 일이 잘됐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흑인부부가 어린애를 키우기에 너무 늙어서 서류를 해 줄 수 없다면 12살짜리 아이를 입양아로 보내겠다'고 제안해 대사관측의 허가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입양아를 데리러 청량리 위생병원으로 가야한다며 나섰는데 마침 자동차가 펑크나는 바람에 내가 종로3가의 수리점까지 따라가게 됐다. 기다리는 동안 근처 노점에서 산 사과를 하나씩 나눠먹던 그는 뜬금없이 "미스터 원은 점심굶고 일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건넸다. 그때까지 점심도 먹지않고 일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나눈 이승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그 길로 위생병원에 들러 두 아이를 건네 받은 뒤 일산 복지원으로 향했다. 입양에 필요한 신체검사를 위해 아이들을 복지원 내 부속병원에 맡긴 그는 언덕아래 숙소까지 걸어 내려오다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긴장된 일과 뒤의 무리한 운동이 가져온 충격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시신을 이불로 덮어놓은 뒤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넋을 놓고 오열했다.
홀트의 죽음은 그만큼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부천에서 풀무원공동체를 열어 가난구제를 시작할 무렵 만난 홀트는 동지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위가 시신을 미국으로 데려간다고 했을 때 나는 "홀트는 항상 아이들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며 적극 만류했다. 미국에 체류하다 뒤늦게 건너온 홀트 여사도 내 의견을 받아들여 홀트는 그리운 아이들 곁에 묻힐 수 있었다. 그의 묘소는 일산 홀트복지원의 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장례식 다음 날쯤에 외국인 선교사와 주한 외국 대사관 관계자들만 참가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됐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추도사를 하게 됐다. 홀트가 살아생전 가장 신뢰한 한국사람이라는 뜻에서 나에게 추도사를 맡긴 듯하다. 나는 그들에게 성인(聖人) 홀트의 일생을 들려줬다. "홀트의 학력은 국민학교 5학년 수료가 고작입니다. 그런 그가 10년 동안 3,000명의 고아를 입양시켜 새로운 가정을 찾아줬습니다. 그가 바친 돈은 50만불로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한 금액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그는 적은 돈으로 더 큰 일을 해냈습니다. 여기 참석한 박사학위를 두세개씩 가진 분들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나에게 그토록 큰 신뢰를 준 사람은 홀트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홀트가 타계하면 홀트복지회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제 1964년 뒤로 복지회를 떠났다. 그러다 홀트의 둘째 딸인 말리 홀트가 복지원을 맡게 되면서 잠깐 이사로 복귀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관선이사들로 복지원이 운영되면서 나는 다시 이사직을 떠나 홀트복지회와 영영 이별을 하게 됐다.
홀트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은 미군들이 만들어 놓은 혼혈아에 대한 자책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사랑을 실천하고 떠났다. 돈벌이로 고아원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넘치던 때에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고아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준 그는 영원한 고아들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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