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와 대통령 선거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지난해 2월22일. 제41회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기총회에 모인 재계 총수들은 '앞으로 법에 의하지 않는 정치자금은 내지 않고 윤리·투명경영에만 전념하겠다'는 강한 어조의 결의문을 채택했다.하지만 그 후 1년반 동안 벌어진 일은 전혀 딴판이었다. 결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재계는 엄청난 규모의 불법대선자금을 살포했고, 결의문 채택석상에 앉아있던 손길승 SK회장은 1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뿌린 당사자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6일 전경련은 또 다시 '정치자금제도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꽤 구체적 방법론을 담고 있지만, 결론은 '불투명한 정치자금은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번 전경련의 다짐 역시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이유는 자명하다. 지난해 결의문을 무색케한 불법정치자금 수수의 한쪽 당사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속죄와 자성의 흔적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단은 돈을 요구하는 정치인과 정치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전경련의 기본시각은 모든 잘못을 '네 탓(정치권)'으로만 돌리려는 자기편의적 발상으로 비춰진다.
정치자금 관련 기업회계문제는 일괄사면하고 집단소송에서 배제되도록 특례까지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과거는 묻지말자'는 생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앞으론 정치자금을 친기업적 정당과 정치인에게만 주겠다고 하니, 과연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수 밖에 없다.
전경련이 진정 자기반성과 개혁의지가 있다면 모든 짐을 정치권에만 떠밀지 말고, 기업 먼저 고해한 뒤, 주주와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순서다.
이성철 경제부 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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