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제가 팔자를 고쳤다고, 혹은 팔자를 고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오라버니만 해도 제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는지 아시잖아요." 춘향은 저를 잡으러 온 군뢰사령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사령은 월매가 권하는 술을 먹고 건네는 돈을 받고는, 관청으로 돌아갔다. '춘향전' 이본을 뒤적거리다가 찾아낸 이야기다.계간 '문학·판' 2003년 여름호에 발표된 단편 '「南原古詞(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김연수(32)씨가 다시 쓴 '춘향전'이다. "춘향전 곳곳에서 미세한 틈새를 찾아냈다. 이야기가 새롭게 쓰여질 수 있는 '구멍'이 보였다."
세 개의 이야기 중 첫번째는 '영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는 춘향의 혼란스런 심정이다. 열여섯 처녀 마음을 설레게 한 두목의 고사와 아름다운 시편을 들려준 사람이 이몽룡이 아니라 변 사또였다면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이몽룡과의 사랑을 회의하는 춘향의 마음이 작가가 찾아낸 첫 틈새다.
군뢰사령을 '오라버니'로 부르는 춘향에게서 두 번째 커다란 틈을 찾았다. 호칭으로 미루어 사령은 관가의 기생이었던 춘향과 오래 알고 지낸 친밀한 사이였을 것이다, 동생같이 어여쁜 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들면서 마음고생을 할 것이 근심이 되어, 월매가 권하는 술을 취하도록 마셨을 것이다. 작가는 이 틈새에서 사령의 인간적 고뇌를, 청춘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애틋해 하는 심정을 읽었다. '이야기가 뒤집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 번째 얘기에 그렇게 바뀐 춘향전의 결말을 썼다. "양란이 끝난 뒤 조선 사회의 분위기와 지방 향리의 엄격한 통제, 기생의 신분적 조건 등을 고려해 봤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에 대입하자 객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보였다. 남원은 향교의 압력이 세서 신임 사또가 학정을 저지르기 쉽지 않다는 것, 일반적으로 암행어사가 되려면 3년은 걸리는데 이몽룡이 1년 만에 어사가 됐다는 것…." 세 번째 이야기에서 남원으로 내려온 박 어사(이몽룡이 아닌)가 변사또에게서 '한 맹랑한 기생이 새벽에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춘향전의 근원설화 중 옥에서 죽은 기생 얘기가 있다. 이 비극이 춘향전으로 흘러 들어와 사랑이 이뤄지는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 내가 찾아낸 틈새의 비약에도 불구하고, 춘향전의 위대함은 사랑을 이뤄주고 싶어하는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데 있음을 알았다." 마지막 한 개의 주석 '춘향가'에 대해 그는 "소설 중 유일한 사실이긴 하지만, 이마저도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등단 10년을 맞은 김씨는 "이제야 '습작기'가 끝난 듯 싶다. 무엇을 쓰든 이야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수상 후보작은 공부하는 작가로서의 김연수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는 심사위원의 평에 대해 그는 "책을 뒤지고 자료를 모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이제는 좀더 이야기에 가까운 정보를 찾아내 상상력을 더 많이 집어넣어 소설을 빚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南原古詞」…'도 그런 노력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 약 력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성균관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중편 '사랑이라니, 선영아',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 빠이 이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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