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대북 경수로 건설 사업 잠정중단 합의는 1994년 제네바 핵 합의의 결과로 시작된 이 사업에 사실상 사망선고가 내려졌음을 의미한다.물론 생명 연장 장치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잠정'이란 단어가 암시하듯 이번 합의로 정해진 중단 기간은 1년이다. 또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이사국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을 경우 사업을 재개할 수 있다는 단서도 달았다.
윤영관(尹永寬) 외교부 장관은 "이는 중단되더라도 1년 후 재개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이 생명연장에 동의할 리 없는 상황에서 이런 장치들은 장식에 불과하다.
미국의 입장은 북한의 핵 개발 의도가 드러난 이상 경수로 지원 사업은 '완전종료'돼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공식화한 상황에서 농축우라늄(HEU)방식보다 플루토늄 추출을 통한 핵 개발이 훨씬 용이한 경수로를 줄 수 없다는 게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뉴욕 타임스는 5일 미 정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핵 에너지 프로그램을 소생할 의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 이런 입장은 6자회담 진전으로 북한으로부터 핵 폐기 합의를 끌어내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상수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그나마 미국이 잠정 중단의 외피를 씌운 것은 한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를 수용한 결과다. 한국 정부는 6자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내세워 신중론을 제기했지만 미국 정부의 완전 중단 요구가 완강한 데다 일본측까지 국내의 여론을 들어 미 정부의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잠정 중단까지는 막지 못했다.
제네바 협정 체결에 관여했던 로버트 갈루치 미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원장은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인한 1년 전 경수로 지원이 중단됐어야 한다"면서도 "완전 종언을 공식화하는 것은 실수"라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과 협상할 때 우리가 가진 모든 당근이 필요하다"며 "제네바 합의가 죽었다는 선언은 국내 청중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북한의 반응이다. 북한은 미측에 제네바 핵 합의를 파기한 책임을 추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북한이 핵 개발을 선언한 이상 핵 동결을 전제로 약속된 경수로 제공을 계속 지원하라고 주장할 명분은 약하다. 이 점에서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6자회담 재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변수는 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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