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가 서울 녹번동에 차린 고아원에는 10여개의 방이 있었고 한 방에 10∼12명씩 모두 150명 정도의 고아들이 수용돼 있었다. 홀트는 그 가운데 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거기에는 장애아들만 있었다. 그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 홀트는 그 중에 머리가 큰 아이 하나를 두 손으로 떠받쳐 들었다. 아이의 팔다리는 힘없이 축 늘어졌는데 근무력증이라고 했다.홀트가 "다른 곳에서는 이런 아이를 받으려 하지 않아 정부에서는 장애아들을 나한테만 보냅니다. 하느님이 나한테 많은 돈을 베풀어 주신 뜻이 바로 이런 아이들과 함께 먹고 살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아이들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라며 갑자기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게 아닌가. 우락부락하다 못해 험상궂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그에 대해 가졌던 좋지않은 기억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홀트가 흘리는 진심의 눈물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홀트를 돕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나는 부천 소사에서 풀무원공동체를 이끌면서 주일이면 예배를 보기 위해 서울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주일날 서울로 나온 김에 예배가 끝나면 녹번동 고아원을 들러 월요일에 일을 돌봐주고 화요일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홀트에게 이야기했다. 홀트는 '이제 의지할 사람을 만났다'며 뛸 듯이 기뻐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부탁했다. 원래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들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시키는 정도로 관여할 생각이었지만 홀트가 이것저것 맡기는 바람에 고아원의 행정사무도 거들게 됐다. 고아원에는 마찬가지로 고아 출신인 보모가 150여명 있었는데 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지만 홀트의 진정어린 사랑에 감동해 힘닿는 데까지 돕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홀트와 인연을 맺게 됐지만 인연의 끈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홀트는 인상에서도 풍기는 것처럼 고집이 센 데다 다소 독선적인 면까지 있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결국 절교를 하는 사건까지 생겼다. 한번은 고아원을 갔더니 보모로 있던 한국 처녀 8명이 해고됐다며 울고불고 난리법석이었다.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미국 청년 하나가 자신이 알고 지내는 여성들을 채용하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이다. 홀트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왜 처녀들을 해고했습니까"라고 따지듯 물었더니 "왜 당신은 내가 하는 일에 그렇게 반대만 합니까, 잘못을 했으니까 내보낸 겁니다"라며 갑자기 화를 버럭 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에 맞서 내가 "무슨 잘못인지 말해 보세요"라고 물러서지 않자 그는 입을 닫고 말았다. 정확한 사정도 모르면서 미국 청년 말만 믿고 내보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십시오, 같은 나라 청년을 신임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 해고된 처녀들이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서 '홀트 때문에 예수를 안 믿게 됐다'고 한다면 어쩌겠으면"고 다그쳤고 그는 끝내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며 물러서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한번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해 오던 터라 "더 이상 당신하고 일을 못하겠다"며 절교를 선언하고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소원한 관계로 지내는 와중에 파면당한 처녀 하나가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에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던 차에 홀트가 부천으로 직접 나를 찾아왔다. 홀트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8명 모두를 복직시켜 주겠다는 데도 보모들이 내 말은 도대체 믿으려 하질 않습니다. 미스터 원이 보모들을 설득하고 나 대신 용서를 빌어줄 수 없겠습니까"라며 애원하듯 물어왔다. 그 길로 나는 처녀가 입원하고 있던 적십자 병원으로 찾아가 위로와 함께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고 홀트와의 관계도 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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