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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파일]<2>길들여지지 않은 폭력/ 평안도 용천 "의계"(義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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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파일]<2>길들여지지 않은 폭력/ 평안도 용천 "의계"(義契) 사건

입력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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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라1896년 8월8일 저녁 무렵 평양 진위대 소속 중대장은 용천 읍내(邑內)에 출동했다. 읍내 시장에 400여명이 모여 깃발을 흔들고 총을 쏘아 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첩보였다. 현장에 달려가 보니 시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義)'라고 쓴 깃발을 치켜 세운 채 술을 먹고,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느라 소란했다. 기세로 보아서는 당장 폭동이라도 일어날 듯했다.

진위대 중대장은 손수 200여명의 군인을 인솔해 운집한 그들을 해산시키는 동시에 군중 가운데서 두목급으로 보이는 몇 사람을 체포했다. 시장 일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달아나는 사람들로 부옇게 먼지가 일었다. 2년 전 1894년에는 농민들이 못살겠다며 무기를 들고 봉기해 정부에 대항해 이듬해에야 겨우 진정되지 않았던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 보고 놀란다고 정부에서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이 모였다는 첩보가 있으면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진위대라는 군대까지 새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잡혀온 자들은 시장에서 계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던 계장(契長) 이추규와 최봉일, 김여성이었다. 이들은 5월부터 '의계(義契)'라는 이름을 걸고 시장 사람들의 치안과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을 운영해 왔는데 이날 다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며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던 차였다. 의계 계원들 대다수가 무뢰배였음은 물론이다. 8일 늦은 밤 진위대 중대장은 체포한 계장들을 용천군 관아로 압송해 매질했다. 압송하는 도중에 이들의 등에 '사(射)' '포(砲)'와 같은 글자를 새겨 마을 사람들에게 죄를 알리기도 했다. 계장 이추규는 50여 대 가까운 태장(笞杖)으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어떻게 평양 진위대 중대장이 시장 계원들의 모임을 알고 급습했을까? 이추규가 알아본 결과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문시정이 고발했다. 문시정은 읍내에서 여각(旅閣)을 운영하며 술과 음식을 팔아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추규에게 원한을 품고 진위대 중대장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문시정과 이추규의 갈등

7월15일 이추규의 계원 가운데 한 사람인 김기남은 자신의 선영(先塋)에 누군가가 투장(偸葬·남의 땅에 몰래 묘를 지음)을 꾀해 소금물을 부어 막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리어 너무 심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이에 아버지 김윤백은 읍내 문시정의 여각에 머물면서 아들 김기남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전부터 관아에 줄을 대고 있던 문시정에게 100냥의 소개비를 주고서야 어렵사리 옥중의 아들을 빼낼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추규는 19일에 문시정을 불러 돈 100냥을 다시 돌려주도록 훈계했는데 이 과정에서 술에 취한 이추규가 문시정의 상투를 잡고 땅바닥에 팽개치는 등 모욕을 주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면서도 문시정은 "형님, 힘 자랑 하지 마시오, 그리 해도 내 상투를 뽑지는 못하잖소"라는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고는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이추규가 계속 구타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문시정은 항상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들었다. 격분한 이추규는 계원들을 동원해 문시정을 흠씬 두들겨 팼고, 그리고도 분이 덜 풀려 문시정의 집으로 몰려가 살림살이를 모두 부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용천 군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도 사람이 다칠까 걱정해서 문시정을 잡아 20여 대를 친 후 성 밖으로 쫓아버리겠다고 약속하고서야 겨우 이 소동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의계 계원들에게 몰매를 맞고 가재 도구가 모두 망가진 것도 억울한데 관에 끌려가 곤장까지 맞게 된 문시정은 복수에 골몰했다. 그러던 중 진위대가 의주 일대 지역을 순행(巡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뢰배들이 시장에 모여 소동을 피울 예정이라고 고발한 것이었다.

이추규의 죽음을 조사하다

이미 중대장에게 수십 여대를 얻어맞아 기진맥진한 이추규는 투옥 중이던 8월11일, 용천 관아 사령들에게 다시 십 여대의 곤장을 맞았다. 문시정이 계원들이 부순 자신의 가산(家産)을 보상할 것과 이를 방조한 이추규를 엄벌하도록 용천 군수에게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며칠 사이에 수십 여 대의 곤장을 맞은 이추규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마련해 문시정의 부서진 가재도구를 보상해 주어야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들 이명록을 불러 읍내 고리대금업자 김석산에게 1,000냥짜리 어음을 받아 관아에 내도록 했다. 이추규는 비로소 풀려나는 듯 했으나 현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곤장을 더 맞게 됐다. 결국 그는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杖毒)으로 8월17일 새벽에 숨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방도가 없었던 아들 이명록은 날이 밝자 계원들의 도움을 받아 문시정을 잡아 관아에 고발했다. 아버지 이추규의 죽음은 바로 문시정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틀 후인 19일 문시정의 친척 수백 여명이 관아로 돌진해 옥을 부수고 문시정을 탈출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문시정은 문중 사람들을 동원해 공권력을 무시한 채 탈옥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용천 군수는 사건을 담당할 수 없게 됐다. 관할 감옥이 공격받아 죄수가 도주한 데다 문시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그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1차 조사(초검·初檢)는 인근 선천군수가 맡기로 하고 2차 조사(복검·復檢)는 곽산 군수에게 이첩됐다. 사건 조사를 완료한 곽산 군수는 이추규가 죽어 마땅하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상 여러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하나하나가 모두 패악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계장의 죄는 마땅히 처벌해야 할 것이었다. (중략) 행동하는 데 마땅함을 일컬어 '의'라 하는 것인데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의'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모임을 '계(契)'라 하는데 도리어 악행을 서로 도왔으니 이를 '계'라고 부를 수 없는 법이다. 깃발을 세우고 총을 쏘았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해괴하며, 또한 사람을 때리고 가산을 파괴하였으니 중대장이 순행 중에 이런 폐단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계인들이 모여 큰 집회를 벌이는데 400여명이나 모였으니 이를 금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무리들 가운데 우두머리를 체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으니 (중략) 이제 죽은 이추규는 항상 몸을 조신하여 분수에 맞게 근신해야 하는데 어찌 100여명을 모아 계를 만들고 불법을 자행하였는가? 이 모두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契, 현재의 조폭과 다를바 없어

조선시대에 한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되었다. 포졸과 사령들은 사건 관련자들을 수배하느라 동네에 들어와 야단법석을 떨었고 그 와중에 토색질이 대단했다. 심지어 구타와 재산 파괴를 일삼아 백성들이 포졸을 호랑이처럼 여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옥중에 갇힌 수많은 백성들은 사또의 엄벌 명령에 따른 포졸의 난장(亂杖·마구 때리는 매)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전답(田畓)을 돌볼 수 없어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됐다.

그러나 포졸과 사령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향촌사회에서 끊이지 않았던 사적 폭력의 위협이었다. 사적인 모임은 종종 '계'의 형태를 띠었으며 일반적으로 동일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조직이 가장 많았다. 오늘날 '계'라고 하면 아주머니들의 동호인 모임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욱 강한 결속력과 강령 아래 계원들을 보호하는 이익집단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늘날의 조직 폭력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추규의 의계 역시 그 강령을 보면, 시장에서 술과 잡기에 골몰하는 무뢰배들을 징벌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이추규와 같은 주점업자들의 이익을 위한 모임에 불과했다. 심지어 계원들이 모일 때 '의(義)'라는 깃발을 내걸고 총을 쏘며 거리를 활보했으니 그 자신들이 바로 무뢰배였다.

이런 동업조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보부상 모임이다. 이들은 상단 우두머리 의 지휘 아래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결심한 가족 공동체와 같았으며, 두목은 계원들의 부부싸움 등 가정생활에까지 간섭하는 등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공권력이나 향촌사회 사조직의 이런 폭력으로부터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는 '혈연'이었다. 문시정이 문중(門中)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권력까지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문시정과 달리 문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동업조직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민초들은 호랑이 같은 사령배, 혹형을 남발하는 사또일망정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관아의 온정과 정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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