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4일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이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했다. 향년 81세. 퇴설당은 그보다 57년 전 성철이 불문에 들어 처음 앉은 자리다. 성철의 속명은 이영주(李英柱)다. 경남 산청 출신.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해인사로 출가해 하동산(河東山) 대종사 밑에서 득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을 돌며 하안거(夏安居)·동안거(冬安居)를 되풀이했는데, 특히 경북 파계사에서 행한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이 잘 알려져 있다.성철의 법어 가운데 세간에 가장 널리 회자된 것은 1981년 1월20일 제7대 종정으로 취임하며 발설되었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사회 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 마지막 대목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단번에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돈오돈수(頓悟敦修)론과 함께, 선지식 성철이 도달한 경지의 이미지를 집약하고 있다. 그 경지는 보통 사람이 가 닿을 수 없는 드높은 차원의 정신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고승·선사의 아스라한 경지일 뿐이다. 필부필부로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동일률의 반복이나 벼락을 맞은 듯한 순간적 깨달음만으로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다름에 대한 분별을 통해서고, 꼼꼼히 따져 봄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그 분별이야말로 과학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성철 식의 동일률과 찰나적 깨달음의 기대 속에 갇혀 무위(無爲)를 실천한다면, 과학적 앎의 진척은커녕 일상 생활의 영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터이다. 사람들이 모두 출가할 수도 없고 출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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