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한한 미국인 교수부부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재작년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 이후 미국 이민국의 정책변화가 화제로 떠올랐다.미국인 부부는 최근 듀크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도 의학자를 청빙하기 위해 비자신청을 하였으나 이민국에서 거절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어이없어 하였다. 불법체류자 문제로 오랫동안 골치를 앓아온 미국이기는 하나, 듀크대학과 같은 명문대학이 신원을 보증한 세계수준의 인재에 대해 비자발급을 거절한 사실은 본인에게도 뜻밖의 일로 느껴졌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올해 서울대 회계학박사과정의 지원자 중 절반가량이 미국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근래 귀국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거의 없던 현상이라 지원서류를 검토할 당시 매우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미국인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의문이 다소 풀렸다. 미국대학들이 테러사건 이후 외국학생들에게 입학허가를 주는 일에 인색해진 것이다. 유효기간이 만료된 비자를 연장하려고 귀국하는 유학생들을 요즘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미국 내에서 비자연장이 가능하였을 터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니 테러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이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쁘게 변했음이 감지된다. 미국이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이다. 테러조직이 뿌리 뽑히지 않는 한 미국의 빗장은 국가안전을 위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미국의 '빗장 잠그기'가 장기화하면 미국과 국제사회는 어떻게 변할지 크게 우려된다. '빗장 잠그기'는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미국의 리더십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은 세계 각국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탁월한 교육시스템에서 훈련시킨 후 이들의 인력을 십분 활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빗장 잠그기'가 장기화하면 미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도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미국이 만일 장기간 문호를 폐쇄하고 국제사회에서 리더역할을 포기한다면 이를 대신할 나라가 필요하다. 일본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일본은 경제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시절 이웃 국가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고서도 보상은커녕 진실한 반성조차 할 줄 모르는 편협한 나라이니 국제사회에서 리더가 되기에는 요원하다. 그렇다고 경제통합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은 유럽연합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리더격인 독일은 통일 이후 구 동독문제로 아직까지 제 코가 석자이지 않은가.
그러면 국토의 크기나 부존자원 면에서 미국과 견줄만한 중국이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중국은 현재 경제발전에만 집착하고 있어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실정이다. 설사 중국의 경제력이 곧 미국을 능가한다 해도 국제사회의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문호의 개방과 아울러 교육, 경제, 법, 정치제도 등을 망라하는 사회전반의 하부구조가 세계수준이 되어야 하며, 국민의 도덕수준도 크게 진작되어야 한다. 중국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한 세기는 족히 걸릴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리더가 될 수 없을까. 지구촌 이웃나라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리더십이라 한다면, 우리나라도 얼마든지 그러한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첫 걸음은 코리안 드림을 품고 이 땅을 찾아오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에게 문호를 지금보다 더 넓게 개방하고 좀더 따뜻하게 품어주는 일이다. 몽골인들은 우리나라를 무지개(솔롱고스)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를 향해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말하는 민족들이 많아질수록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다.
정 운 오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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