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57돌을 맞으면서…,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 미사 및 기도회'에서 성명서가 발표됐다. 서명자는 10명이었다.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내용의 요지는 '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 돼야 한다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져야 할 지상의 과업이다'로 간추려져 있었다. 미사와 기도회는 조용히 끝났다.열흘 뒤인 10일 오후 서울지검은 '일부 재야 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을 발표하면서 가담자 2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서명자 10명 외에 선언문 제작에 관여한 문익환 이해동 목사, 이태영씨,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신부가 공모자로 추가됐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당국은 '명동 사건'이라 불렀음)이었다.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73년)이나 민청학련 사건(74년)과 마찬가지로 '유인물을 증거로 반(反)유신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수법'의 전형이었다.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은 70세 이상의 고령으로, 이태영 이우정은 여자라는 이유로, 김승훈 장덕필 신부는 직접 가담자가 아니어서 불구속(7명) 하고 11명을 구속 기소했다. 18명 모두가 성직자(목사 6, 신부 5명)거나 신·구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이 사건은 신·구교 내의 반유신 세력과 김대중씨 주변의 재야·정치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 기독교계 전체가 반유신 연합전선을 갖도록 정비해주고, 김대중씨를 이 세력의 구심점으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국의 발표도 제목만 '명동 사건'이지 피의자 가운데는 원주 원동성당의 신·구교 연합기도회(1월 23일)와 천주교 전주기도회(2월 16일), 갈릴리교회와 목요기도회(한빛교회)의 주요 책임자가 모두 끼워져 있었다.
이해동(李海東·68·당시 한빛교회 담임목사·현 덕성학원 이사장)씨의 설명. "문익환 목사의 제자(한국신학대)로 심부름하고 타이핑도 하고 유인물을 만들었다. 사건의 출발과 산실은 갈릴리교회와 목요기도회였다. 유신으로 해직된 기독교계 교수·언론인들이 문 목사를 중심으로 갈릴리교회를 만들었다. 75년 8월 17일 명동 대성빌딩에서 첫 예배를 가졌으나 이후 건물주가 임대를 거절, 미아리 한빛교회로 장소를 옮겼다. 70년 문 목사가 세운 한빛교회는 당시 내가 뒤를 이어 담임목사를 맡고 있었는데 주일 오전에는 한빛교회, 오후에는 갈릴리교회가 되었다. 갈릴리교회는 이해영 당회장 아래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이우정 등 6명의 지인들이 교대로 설교를 했다. 갈릴리교회는 이들 6명의 강사로 인하여 '민중신학'의 산실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이 '민주구국 선언'의 주모자들이다.
74년 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 사건이 터진 뒤 8월부터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기도회를 가졌다. '목요기도회'는 매달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주도한 '인권미사'와 함께 시국 종교집회의 양대 축이었다. 신·구 기독교계는 서로 상대방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구속자 유가족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넓혔다. '3·1 선언' 서명자인 윤반웅 목사(신흥교회)는 목요기도회에서 '박정희와 그 일당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가 경찰에 잡혀가 정작 명동집회에는 참석하지도 못했다."
성명서 낭독이 국가전복 음모로 비화한 데는 김대중(일본서 납치, 73년 8월 13일 귀국)씨의 서명 참여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해동씨와 이우정(李愚貞·전 국회의원·2002년 사망)씨의 설명과 증언에 따르면 76년 2월 김대중씨는 독자적으로 '3·1절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씨는 정일형 의원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요청했다. 부인 이태영씨는 문익환 목사의 심부름을 온 이우정씨에게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키로 약속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김대중-정일형-이태영-이우정-문익환 형태의 연결고리가 형성됐다. 이우정씨의 회고. '중부경찰서로 연행돼 밤샘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각서나 한 장 써놓고 가라고 했다. 담당 형사와 함께 밖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경찰서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곧바로 정보부로 넘겨졌다. 나중에 안 일인데, 3·1절에는 으레 교회나 성당에서 성명서 같은게 나오는 만큼 대충 넘기라는 지시가 새벽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2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김대중씨가 서명한 것을 안 박 대통령이 노발대발해 모두 잡아넣고 엄히 다스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구속된 11명은 모두 12월 29일 결심공판에서 징역5년까지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해동 안병무(76.12.29·집행유예) 윤반웅 신현봉(77.7.17) 함세웅(77.12.25)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문정현(77.12.31)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대중씨는 77년 12월 18일 마지막 석방 기회(77.12.31)를 앞두고 본인과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강제 치료'를 받다가 78년 12월 27일 박 대통령의 9대 취임식을 기해 풀려났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선언 낭독한 故 이우정(李愚貞)여사 증언
1976년 2월 12일 재직 중인 서울여자대학에서 총장의 호출을 받았다. 교수직을 그만 두든지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직을 사임하든지 택일 하라고 했다. 며칠 말미를 얻어 문동환 교수와 의논했다. 그는 75년 6월 안병무 교수와 함께 한신대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대답은 간단했다. 대학 교수는 할 사람이 많지만 연합회 회장은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총장으로부터 '참 바보 같은 선택'이라는 힐난을 들었다. 43세 때였다.
2월 19일 오후6시까지 수유리 안병무 교수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교수 등 갈릴리교회 주요 멤버들이 모였다. 문 목사가 "3·1정신을 되새기고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자는 대국민 호소문 초안을 만들었다. 함석헌 선생에게 동의를 얻었다. 여러분도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문 목사는 장준하(75년 8월 17일 사망) 선생의 죽마고우로 그의 영정을 책상 위에 갖다놓고 매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지냈다. "얼마 전 영정을 바라보며 '3·1절이 다가오는데 네가 살았으면 뭔가 뜻 있는 일을 할 텐데'라고 했더니 그가 '네가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라"고 덧붙였다.
문 목사가 만든 초안을 중심으로 서명자 명단을 선정했다. 많은 사람이 동참을 원했지만 구속이 예상되므로 신경이 쓰였다. 문 목사는 작업 중인 성서번역을 마무리하고 4·19 행사도 준비해야 하고, 김관석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를 맡고 있었으며, 박형규 목사는 얼마 전 형무소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또 부부는 남편만 '감옥에 가기로' 합의했다.
2월 29일 갈릴리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니 항상 그랬듯이 정보과 형사들이 집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행사 때 집을 나서지 못하게 막을 것이 분명했다. 밤 11시쯤 몰래 나와 아현동에 있는 캐나다 여선교사 아파트로 갔다.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오후 6시 명동성당에 가니 700여명의 신도들과 동지들이 모여 있었다. 장덕필 신부의 사회로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하는 미사가 시작됐다. 김 신부는 3·1절의 의의를 되새기며 정국을 비판했다. 신·구교 합동기도회가 이어졌고 문동환 교수가 설교를 했다. 전주에서 올라온 문정현 신부가 전주 기도회(2월 16일)에서 낭독했던 '김지하 시인 모친의 호소문'을 읽었다. 이어 윤반웅 목사가 '3·1 민주구국 선언서'를 읽기로 돼 있었는데 윤 목사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내가 대신 낭독하게 됐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담은 기도입니다"라고 말한 뒤 강단을 내려왔다. 주위에 있던 형사들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으며 장내는 침묵으로 한동안 술렁였다. 사회자가 합동기도회가 끝났음을 선언하니 밤 9시30분이었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형사들이 들어왔다. 내일 아침 외국인과의 약속이 있는데 가지 못할 것 같으니 연락해야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전날 함께 잤던 캐나다 여선교사(Willa Kernent·한국명 구미혜)에게 전화를 했다. 영어로 "내일 약속에 못 가게 됐다"고 말하자 그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밤11시(미국 시간 3월 1일 오전10시)였다. 그는 곧바로 미국교회여성연합총무(Dorothy Wagner)에게 연락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보고됐다. 미국에선 3월 1일 오후부터 우리들 사건이 보도됐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2일 새벽부터 각종 국제단체로부터 항의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못 자고 못 쉬게 하는 10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들이 만든 도표에는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정부를 전복하기로 하고, 공덕귀 이태영 이우정을 연락원으로 해서 교수와 목사·신부들을 끌어 들였다'고 돼 있었다. 우리의 동기를 설명하며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자기들 주장대로 조서를 꾸몄다. 나는 진술을 거부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뻗댔다. 10일 새벽 5시쯤 석방됐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곧바로 나를 연세대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날 낮 '3·1 민주구국 선언서' 사건에 대한 당국의 첫 발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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