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눈으로 지고, 낙엽은 가슴으로 진다.지는 꽃은 눈으로 처량하지만, 지는 낙엽은 가슴으로 처연하다. 시들어 차마 땅으로 떨어지지 못하는 꽃은 차라리 추하다. 눈부신 초록 인생을 다하고 한줄기 바람에 제 몸을 기꺼이 내맡기는 낙엽. 그 사무치는 풍경 뒤에는 가야 할 때를 알고 생에 대한 집착을 깨끗이 버리는, 장엄한 자연의 이치가 있다. 낙엽은 생명의 쇠락이며 허망한 인생과 닮았다고도 한다. 그 쇠락은 그러나 다가올 새봄에 언 땅을 박차고 약동할 생명을 위한 기약이요 희망이기에 결코 덧없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그래서 낙엽은 생명이다. 낙엽은 이울어가는 가을의 마지막 선물이다. 스산한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남자의 쓸쓸한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손은 플라타너스의 넓고 투박한 이파리들이다. 수줍은 새 색시처럼 샛노란 은행잎은 꿈 많은 소녀의 책갈피에 곱게 꽂힌다. 먼 훗날 그 책을 들추던 소녀는 책갈피 속 정숙하게 늙은 은행잎을 발견하고 어릴 적 아련한 추억에 미소 지으리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낙엽비는 해맑은 아이들의 몫이다. 가을의 신기한 조화에 봄날 병아리들처럼 재잘거리며 마냥 즐거워한다. 그 옆 벤치에 다정하게 앉아 조락(凋落)의 계절을 완상하는 노부부. 가을 햇살을 머금은 온화한 낙엽을 닮았다.
깊어가는 이 가을, 밤새 거리에 수북이 내려앉은 낙엽을 밟아보자. 고맙게도 요즘은 낙엽이 그리는 멋진 가을소묘가 무심한 빗자루에 쓱쓱 지워지는 일은 없다. 호젓한 고궁의 돌담길이 아니어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도 좋다. 무뎌진 발끝으로 서걱서걱 낙엽을 느끼며 계절의 침묵을 들어보자. 거리를 뒤덮은 낙엽만큼이나 추억은 두툼해지고 사색은 깊어지며 낭만은 쌓인다.
책장 깊숙이 잠든 학창시절 읽었던 책들도 꺼내보자. 그 시절 소중한 꿈과 함께 책갈피에 꽂아둔 단풍잎이며 은행잎이 어디선가 보석처럼 빛날 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허전한 마음은 충만하게 채워진다. 가을은 떠나가고, 낙엽은 우리 빈 가슴에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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