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6·25 전쟁에서 입은 깊은 상처를 평생 훈장처럼 간직하신 당신은 결코 남을 탓하지 않으셨지요.이 나라를 지켰다는 자긍심은 자랑이 되어야 했지만 어린 자식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매년 현충일이면 원호대상자라고 해 원호청(지금의 국가보훈처)에서 보낸 간단한 선물을 주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하얀 운동화가 나왔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원호대상자 자녀, 나와서 운동화를 받아 가라"고 했을 때 아버지가 원호대상자라는 것이 부끄러워 나가지 않았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났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절름발이', '의안'이라 놀려대는 것이 싫어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고2 때 장티푸스에 걸려 머리카락이 반쯤 빠지고 몸무게가 30㎏대로 떨어졌던 거 기억 나세요? 다른 사람들은 병이 옮는다고 근처에도 오지 않았지만 논에서 막 잡아온 생쥐 새끼로 보양식을 손수 만들어 주셨잖아요. 한여름인데도 새벽에 군불을 지펴주고 잠든 아들의 이마에 거친 당신 손을 가만히 얹고, 흘리시던 뜨거운 눈물이 제 얼굴에 떨어질 때 "아버지"하고 한번 안아 드려야 했는데 그냥 자는척했습니다. 중 2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1985년 군에서 특박을 나왔을 때 저는 해쓱한 모습으로 당신 곁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손길을 뿌리치고 대구에 있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나갔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지요. 형님이 아버지가 학비에 보태라고 하셨다며 꼬깃꼬깃한 돈을 전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서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이 못난 셋째는 벌써 아이 셋을 둔 가장이 되어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온천을 좋아하셨는데, 그 시절 제대로 한번 가보시지 못하셨지요. 좋은 온천에서 아버지 몸에 난 전쟁의 상처를 물로 씻어 드리고 싶어요. 오늘도 아버지가 계신 무덤에는 국가유공자의 비석이 못난 아들을 맞아줍니다. 아버지, 아픔 없는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히 쉬십시오. 셋째 아들 드림.
/최해경·경북 경주시 천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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