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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현장/군정땐 "미관해쳐" 요즘엔 "신도시개발"… 두 번 쫓겨날 판 기구한 판교 개나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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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현장/군정땐 "미관해쳐" 요즘엔 "신도시개발"… 두 번 쫓겨날 판 기구한 판교 개나리마을

입력
2003.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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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가 있어야지. 동네북도 아니고 또 나가라니 말이 돼." 집 댓돌에 앉은 김영옥(69) 할머니는 가슴부터 쳤다. "그땐 서슬 퍼런 군정이었다지만 이 나이에 집을 옮기면 적응이 되겠어? 돈으로 쳐 발라도 안 나갈껴. "노인회관에 들어앉은 주민들은 판교신도시 지도를 요리조리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마을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며 허옇게 센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여든 줄에 접어든 점포 할아버지도, 아기 들쳐 멘 세입자 아낙도 눈앞에 다가온 개발이 탐탁치 않은 눈치다.고속도로 판교IC 부근에 터를 잡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개나리마을(판교3통) 92가구 295명은 마을이 판교신도시 예정지구 안에 들어가자 "또다시 이삿짐을 꾸리게 됐다"며 볼멘 소리를 냈다. 주민 대부분이 60∼70세 고령이어서 변변한 투쟁단체 하나 꾸릴 형편도 못 되는 터라 70대 통장이 아쉬운 대로 '총대'를 멨지만 보상 몇 푼 더 받으려는 수작이라는 외부 비난과 존속 불가로 가닥이 잡혀가는 현실에 주민들은 그저 속앓이만 하고 있다. 올 연말 토지보상에 착수, 2005년 4월 착공 예정인 판교지구 택지개발사업(283만7,000평, 2만9,000여 가구)이 다른 마을에선 보상문제 때문에 시끄럽지만 개나리마을에선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건 마을이 지닌 남다른 역사와 사연에서 비롯된다.

개나리마을은 1978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취락구조개선 시범마을로 조성됐다. 원래 마을은 경부고속도로에서 고작 25m 떨어진 지점에 있었으나 경부고속도로 주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1㎞나 떨어진 지금 자리에 강제 이주하게 됐다. 결국 개나리마을 조성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도로 주변 판잣집을 허물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꿨던 취락구조개선사업의 완결판인 셈. "박통 업적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고속도로 쪽인 동향으로 지었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린다.

구릉으로 둘러싸인 8,000여 평의 개나리마을엔 당시로선 최신식인 25평짜리 2층 양옥과 10평짜리 창고가 들어섰다. 담장 대신 두른 낮은 울타리엔 꽃을 심었고 정원엔 살구나무 대추나무 등 과실수가 자라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덕분에 주택은 많이 낡았지만 집을 감싼 나무와 넓은 도로만은 여전히 운치를 전하고 있다. 나랏님이 꾸민 마을이라 취락개선사업 모범 사례로 유명세도 치렀다. 각 지역 기관장은 물론이고 동남아에서까지 견학을 왔다. 쫓겨나다시피 80년 집을 옮긴 주민들도 7,8년 동안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한 것 외엔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마을에 정을 붙였다.

20년 넘게 살아온 마을이 또다시 재이주 도마 위에 오른 것은 95년 판교신도시 개발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주변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개나리마을 주민들은 개발 찬성 쪽에 섰다. 단 마을을 유지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약속은 잊혀져 98년 마을이 판교신도시 개발예정지구로 편입되자 2000년부턴 수 차례 마을 존속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와 건교부, 성남시, 토지공사 등에 냈으나 허사였다.

주민들의 요구는 소박하다. 13대째 판교토박이 남국현(70) 통장의 말. "정부시책을 반대하는 게 아냐. 분당 야탑동에도 아파트 단지 중간에 움푹 들어간 웅덩이마냥 마을을 살린 사례가 있으니 봐달라는 거지."

김영훈(72)씨는 "마을을 제외한 땅은 개발해도 돼, 보상을 더해 달라는 것도 아냐. 이주 대출금도 몇 년 전에야 갚고 늙어서 갈 데도 없으니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정든 마을에서 접고 싶다"고 했다. 주민들은 "80년에 재이주는 없을 거라고 약속을 했으니 당하고 있지만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판교가 개발되면 개나리 마을 부지엔 학교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토공 판교사업단 관계자는 "남겨놓으면 슬럼화 등 부정적인 면이 많아 마을 존속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성남=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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