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이 진다. 지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날린다. 하얀 꽃(실은 씨앗)이 바람을 타고 떠돈다. 가느다란 꽃 대궁만 남는다. 억새꽃이 질 때를 기다려 꽃을 피우는 것이 있다. 갈대다. 꽃 피우는 시기와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억새와 갈대는 분명 다르다. 억새를 보려면 산에 올라야 하지만 갈대를 찾으려면 물가에 가야 한다. 동해안으로 떠난다. 맑은 파도가 몰고 온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고 있다. 동해안의 석호(潟湖)로 향한다.한반도에 수많은 호수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 스스로 만든 호수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흐르는 물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가 대부분이다. 자연 호수가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엉뚱하게도 동쪽 바닷가이다. 바람과 파도와 모래가 물을 가둬 놓은 석호이다.
바닷물과 민물이 공존하는 곳. 사람들이 살기에 좋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몰려 손때를 많이 탔다. 경포호 등이 예이다. 그렇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때가 엷어진다. 강원 고성군의 화진포, 송지호, 속초시의 영랑호 등은 여전히 맑은 물빛을 쏟아낸다. 지금 누렇게 익은 갈대가 손짓하고 있다.
화진포(강원 고성군)에는 해당화가 많았다. 그래서 옛 이름이 화담(花潭)이었다. 예쁜 꽃이기도 하지만 몸에 좋은 약초이기도 하다. 많이 뜯겼다. 하지만 여전히 해당화가 많다. 고성군의 군화가 해당화이다. 소나무도 많다. 화진포 주변의 언덕에 수령 100년이 넘는 소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곳으로 꼽혔다. 김일성 전 북한주석은 물론, 이승만 전대통령, 이기붕 전 국회의장이 이 곳에 별장을 지었다. 이념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이 곳을 최고의 휴식처로 꼽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그 별장들은 지금 모두 개방돼 1,500원의 입장료를 내면 세 곳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그들이 살았을 때의 사진이나 치적과 관련한 기념물을 모아 놓았다. 구식 반공교육장 같은 분위기가 좀 거슬리지만….
화진포의 둘레는 16㎞이다. 느긋하게 걸으면 한 바퀴를 도는데 4시간 넘게 걸린다. 갈대를 잘 볼 수 있는 곳은 동쪽 호숫가를 따라 난 도로. 김일성 별장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500m 달리면 오른쪽에 마을로 진입하는 소로가 나타난다. 이 길의 양쪽이 갈대 천지이다. 조심해서 걷되 놀랄 각오를 해야 한다. 벌써 철새들이 날아와 갈대밭 속에 들어있다.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인기척이 나면 한꺼번에 수백 마리가 날아오른다. 털썩 주저 앉을 만큼 깜짝 놀란다.
송지호는 소나무가 많은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1996년과 2000년 등 두 차례의 산불이 소나무를 싹쓸이하듯 훑어가 지난 해만 해도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올해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살아남은 소나무들이 제 색깔을 찾았고 새로 심은 아기 소나무들이 그런대로 덩치를 자랑하고 있다.
송지호의 한가운데는 섬처럼 육지가 삐죽 파고 들어와 있다. 송호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 살아남은 노송이 우람한 가지를 뒤틀고 있다. 송호정은 큰 길에서는 들어갈 수 없다. 송지호의 남쪽 끝에 구성리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샛길을 타고 500m 정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또 하나의 샛길이 나온다. 남쪽 호숫가를 따라 나 있는 호변도로이다. 절반은 시멘트 포장이고 절반은 비포장이다. 승용차로도 들어갈 수 있지만 운전이 서툰 사람은 포장길 끝에서 차를 세우고 걷는 것이 좋다. 송지호의 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속초 시내에는 두개의 호수가 있다. 영랑호와 청초호이다. 청초호가 더 넓고 물이 깊지만 주변에 아파트촌이 들어서 옛날의 풍치를 많이 잃었다. 영랑호도 인공의 냄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해질녘에 찾아야 제격이다. 호수의 동쪽에 선다. 서쪽으로 설악산의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가 넘어가면서 칼날 같은 산록의 실루엣과 붉게 물든 호수의 물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또 있다. 붉은 호수를 가르며 까맣게 지나가는 점들. 철새는 이미 영랑호에도 들었다.
/고성·속초=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가는길
6번 국도를 이용해 양평을 지난다. 양평군 용두리에서 길이 갈린다. 직진하면 홍천행 44번 국도. 홍천을 거쳐 신남-인제-원통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한계령, 왼쪽은 진부·미시령으로 가는 길. 석호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구경하거나 오색약수를 마시고 싶으면 오른쪽 한계령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을 하고 싶으면 왼쪽 진부·미시령길을 택한다. 진부령을 넘으면 화진포와 가까운 간성에 닿고, 미시령을 넘으면 영랑호가 있는 속초시로 들어간다. 동해안에서의 여행법은 쉽다. 모든 호수가 7번 국도변에 있다.
머물곳
대형 숙박시설이 많다. 단풍이 시들해지는 이번 주말부터는 비수기다. 꼼꼼하게 알아보면 고급 숙박시설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금강산콘도(02-525-5237)를 비롯해 설악대명콘도(02-2000-2003) 한화설악콘도(033-635-7711) 등이 대표적인 숙박시설이다. 해안을 따라 숙박시설이 이어져 있다.
먹거리
요즘 동해안의 새로운 먹거리는 어죽이다. 어죽하면 대부분이 민물 어죽을 떠올린다. 금강을 끼고 있는 충남 금산이나 충북 영동 등이 유명하다. 동해안의 어죽은 물론 바다 물고기로 조리한 것이다. 뼈와 대가리를 푹 곤 국물에 쌀과 야채를 넣어 끓였다. 뚝배기나 돌솥에 내기 때문에 다 먹을 때까지 뜨겁다. 은근한 구수함이 입안에 가득 찬다. 횟집에서 회를 먹고 나면 "식사를매운탕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어죽으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을 정도로큰 인기를 얻고 있다. 양양군 남애항의 횟집촌 등이 유명하다.
진짜 강원도식 동치미 막국수를 먹고 싶으면 화진포의 박포수가든(033-682-4856)을 찾는다. 바가지에 하얀 무가 둥둥 뜬 시원한 동치미국물이 육수로 나온다.
주변명소
우리 나라의 가장 북쪽을 경험하는 여행이다.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첫째는 통일전망대. 화진포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5㎞ 달리면 통일안보공원(033-682-0088)이다. 이 곳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고 다시 10㎞ 북상하면 통일전망대다. 북녘의 해금강이 한눈에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해금강과 연결된 금강산의 바위 봉우리도 볼 수 있다.
둘째는 건봉사(682-8100)로,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있다. 금강산 자락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과거 설악산 신흥사와 양양의 낙산사와 같은 대찰을 말사로 거느린 '거찰'이었다. 1878년 큰 불이 나 건물 중 3,000여 칸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과거엔 군사 지역에 들어있어 일반인들은 참배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절 앞까지 포장도로가 났다. 부처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적멸보궁 앞에서 내려다 보면 과거 절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진신치아사리는 종무소에 모셔져 있다. 일반인도 친견할 수 있다.
건봉사의 불이문. 단청이 단풍보다 곱다.
● 석호란
해변에서 오목하게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부분을 만(灣)이라고 한다. 파도나 조류 등에 의해 모래흙이 만의 입구에 쌓인다. 계속 쌓여 물막이처럼 만을 막게 되는데 이 물막이가 사주(砂洲)이다. 사주의 안쪽은 바다와 분리된 호소가 된다. 이것이 석호이다. 석호는 사주의 낮은 부분이나 모래 밑을 통해 바다와 물이 서로 교통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민물보다 염분의 농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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