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서울 강북구 미아3동 주택가. 빽빽이 들어찬 연립주택 사이 고갯길을 한참 올라가자 아담한 크기의 놀이터가 보인다. 아치형 입구와 놀이터를 빙 두른 화단 꾸밈새가 예사 놀이터와는 다르다. 덩달아, 부산을 떨며 뛰노는 아이들의 표정도 정자에 앉아 담소하는 노인들의 얼굴도 밝아 보인다. '놀이터가 참 예쁘다'며 운을 떼자 할머니들은 놀이터 한 켠에 선 컨테이너 박스를 가리킨다. '토박이'라는 간판을 단 컨테이너 안에서는 5명의 주부들과 아이들이 한가롭게 동화책을 읽고 있다.활기 넘치는 이 놀이터의 이름은 '한빛놀이터'. 주택가 놀이터와 공원 대다수가 쓰레기 하적장이나 노숙자 잠자리, 청소년 탈선 장소로 변질되면서 주민들이 외면하고 있지만 한빛놀이터는 사정이 딴 판이다. 주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놀이터를 가꿔, 마을잔치를 비롯한 문화·체육 행사가 열리는 주민 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곳 역시 2년 전만 해도 악취 내뿜는 쓰레기와 유리병 조각이 예사로 널려있던 '버려진' 공터에 불과했다. 부모들이 아이를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 "줄 한 쪽이 끊어진 그네에 매달려 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죠. 깨진 병 조각들 옆에서 노는 모습이 얼마나 아찔하던지…." 주부 이순영(35·강북구 미아동)씨는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집에 가둬 둘 수만도 없는 노릇.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열린사회 시민연합 북부시민회가 '가고 싶은 놀이터 만들기 운동'을 함께 해보자는 뜻을 전했고 주부들은 '토박이'라는 모임을 결성, 본격적으로 놀이터 살리기에 나섰다. 그게 3년 전 이맘 때의 일이다.
회원들은 동네를 돌며 주민들의 동참을 호소했고, 118명의 서명을 첨부한 '놀이터 바꾸기' 제안서를 강북구청에 제출했다. 구청과 관할 파출소를 오가며 놀이터의 위험한 곳을 교체해 줄 것과 놀이터에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놀이방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놀이터 구조물 설치 위법성을 들어 난처해 하던 구청측은 주민들의 열의에 놀이터 출입구를 계단 대신 경사로로 교체하고 구조물들을 정비해주는 등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놀이방 허가도 그렇게 어렵사리 얻어냈다.
토박이 회원들은 마을 바자 수익금으로 컨테이너를 구입, 아담한 사랑방을 마련했고 집집마다 돌며 모은 동화책과 구급약을 비치했다. 쓰레기가 쌓였던 자리는 아이들의 이름표를 단 꽃동산이 됐고, 지난 달에는 아예 놀이터 둘레를 화단으로 꾸몄다. 놀이터를 찾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갔고, 마을 어른들도 양로원 대신 놀이터를 찾게 됐다. 회원들은 당번을 정해 사랑방을 지키며 아이들과 책도 읽고 큰줄넘기 놀이판도 벌인다. 회원 최경희(33)씨는 "엄마들이 나와 있으니까 다들 안심하고 아이들을 내보낸다"며 "요즘은 이웃 동네에서 놀러 오는 아이들도 있는 눈치"라며 웃었다. 따지고 들자면, 아이들 뿐 아니다. 이순영씨는 "노래자랑이나 영화제 같은 행사 때 이웃 동네 주민들까지 찾아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너무 기쁘다"고 했다.
한빛놀이터는 지난 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실시한 '제1회 시민과 함께 성장하는 풀뿌리 지역 시민운동 사례 공모전'에서 최고상인 '풀뿌리상'을 받았다.
이 밖에 은평구 갈현동 갈곡리공원도 2000년 지역 주민들이 '갈곡리를 사랑하는 주민모임(이하 갈사모)'을 만들어 구청과 함께 환경을 정비, 가을 축제를 여는 등 지역 놀이터와 공원을 되찾으려는 주민들의 움직임이 확산되는 추세다. 은평시민회의 최순옥 간사는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마당이 생기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며 반겼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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