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 서독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내가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풀뿌리 민주주의와 훌륭한 사회복지제도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개개인의 인권에 대한 배려도 빠질 수 없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그 1년 만에 동독인이 국민투표를 통해 서독으로의 통합을 결정한 것도 서독 체제가 지닌 이런 강점 때문이다.송두율 교수의 귀국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소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송 교수 가족이 귀국하기 1주일 전부터 취재진은 그의 베를린 자택 근처에 진을 쳤고, 가족들은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언론의 취재 열기와 이어지는 국정원 검찰의 수사로 경황이 없던 송 교수는 구속 이후 평온과 생각할 시간 그리고 글 쓸 기회를 갖게 된 것에 안도하고 있다고 변호사는 전한다.
국가정보원은 수사결과 발표 이전에 언론과 정형근 의원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슬쩍슬쩍 흘리곤 하였다. 언론의 과당경쟁은 도를 지나쳤고, 어떤 일간지는 1면부터 4면까지 전면을 송 교수 기사로 도배를 하였다. 그 시점에 파병문제, 정치개혁 등 중요한 기사거리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언론이라면 당연히 과거 송 교수 활동의 어느 부분이 실정법에 저촉되는가에 집중해야 하였다. 그러나 언론은 인신공격에 열을 올렸고, 그는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가 교수가 아니라는 주장에서부터 급기야 어느 신문은 그의 지도교수 하버마스와 전화인터뷰를 실었는데, 이는 하버마스는 송 교수와 별로 가깝지도 않고 이 문제에 별 관심도 없다는 인상을 주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 언론의 냄비기질과 무책임한 폭로주의는 그렇게 나타났고, 지금 46명의 송 교수 변호인단은 사실을 왜곡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송 교수 사건과 관련하여 섣부른 관용을 거론할 생각이 없다. 그가 실정법상 잘못하였다면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선행할 과제는 검찰 조사와 재판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알아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양 체제 사이에 끼인 불행한 개인에 대해 배려하는 사람이라면, 송 교수가 살아온 과정의 역사적 맥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송 교수는 예외적인 한 사례가 아니다. 여전히 해외에는 남북사이에서 어쩌지 못하는 경계인들이 방황하고 있다. 성숙한 한국 사회라면 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송 교수 사건은 그 시금석에 해당한다.
이번에 국정원과 검찰 말고도 언론이 앞장서서 전향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송 교수는 이미 자신의 과거 행적을 사과하였고, 한국의 실정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수 차례 하였다. 학자로서 살아온 한 개인의 양심을 전향과 비전향이라는 조야한 이분법에 묶는 것도 비인간적이려니와, 전향제도는 이미 오래 전 유엔 인권위원회가 철폐를 종용한 제도이다. 송 교수 사건과 관련하여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한국언론은 관찰자가 아니라 '게임플레이어'라고 표현하였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서글픔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그사이 남북학술교류를 위해 경쟁적으로 송 교수를 활용하였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왜 침묵하는가. 검찰의 주장처럼 그 학술교류는 북한의 대남전략의 일환이었는가.
실체적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기 전에, 국정원과 언론의 주장을 토대로, 한 사회가 한 개인에 가하는 단죄를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무서워졌다. 이런 점에서 서독은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다. 이제 우리도 분단이 만들어낸 이런 갈등에 대해 좀 더 성숙하게 대처하는 체통 있는 사회를 기대할 수 없는가.
정 현 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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