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조선 후기의 형사 사건을 소개하는 '조선시대 사건파일'을 연재합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형사 사건 조사·처리 보고서인 '검안(檢案)'에 드러난 대표적 사건을 골라 10회 연재, 당시 사회상과 민중생활, 수사 체계를 살핍니다. 집필은 검안 600 건을 번역·정리한 서울대 규장각 김호(36) 책임연구원이, 삽화는 중견 한국화가인 이철량(51) 전북대 교수가 맡습니다.
아내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음력 6월이라 더운 날씨였다. 문경군수 김영연은 아침 일찍 서둘러 관아에 출근해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북면 화지리의 존위(尊位·마을 어른) 최상보가 동헌으로 들어섰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양반 안도흠의 고발장을 들고 왔다.
'사또 나리, 제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5월 동네 상놈 정이문에게 겁간당할 뻔한 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달 2일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어찌 상놈이 반가(班家)의 여성을 겁탈하려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다니 참으로 큰일이로다. 또 상놈이 양반 부인을 겁탈하려 하다니 이건 또 무슨 변고인고?"
김영연은 서둘러 검험(檢驗·현장에 나가 시체나 상처를 확인하는 일)에 필요한 도서와 도구를 준비하도록 서리들에게 명하고 기록 담당 서리를 비롯, 검시에 동반할 의생(醫生), 율생(律生) 및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 등을 이끌고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우선 사건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최상보를 심문했다. 그의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6월2일 밤 정이문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나기에 가 보았더니 안도흠의 식구들이 모여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며느리 황씨 부인이 목을 맨 채 숨져 있었다는 것이었지요. 안씨 부자가 숨진 황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며 나에게는 빨리 관아에 사건을 보고하라고 다그쳐 다음날 보고하게 됐습니다."
사건의 열쇠를 쥔 정이문은 이미 달아났으므로 황씨 부인의 남편 안재찬을 불러 심문했다. 30세의 젊은 양반인 안재찬은 5월에 상놈 정이문이 안방에 잠입해 아내를 겁간하려다가 자신의 눈에 띄어 담을 넘어 도주했고,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또 수치심을 느낀 아내가 여러 차례 자진하려는 것을 자신과 아버지가 말려 오던 차에 이런 변고를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숨진 아내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26세이며 결혼한 지 12년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겁탈, 또는 간통?
동네 사람들을 심문했지만 모두들 모르쇠였다. 다만 달아난 정이문의 조부 정태극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손자가 황씨 부인을 겁탈한 게 아니라 5,6년 전부터 둘 사이가 남달랐다"고 했다가 이내 "제가 정신이 혼미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믿기도 어렵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검시를 해야 할 차례였다. 먼저 사건 현장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필요해 자를 꺼내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을 쟀다. 시신은 머리를 동남쪽으로 향한 모습으로 동쪽 문지방에서 3치, 서쪽 벽에서 6자5치, 남쪽벽에서 3자1치 떨어져 있었고, 북쪽 벽에 두 발이 닿아 있었다. 방 안이 너무 좁아 여러 사람이 몸을 움직이기 불편했고 검시는 더더욱 어려워 시체를 밖으로 꺼내게 했다.
오작사령이 밝은 곳으로 시체를 떠메어 옮겼고 시체의 옷가지며 버선 따위를 하나씩 벗겨냈다. 원래 양반집 부녀자 시체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겨 검시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는 법례(法例)가 있긴 했지만 검시(檢屍)를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오작사령 김일남은 능숙한 솜씨로 죽은 황씨의 9폭 치마를 벗겨냈다. 그리고 허리띠를 풀고 적삼과 목면 홑바지를 벗겨 낸 후 마지막 남은 속옷을 벗기니 배설물이 어지럽게 묻어 있는 변사체였다. 최종적으로 신고 있던 버선까지 벗겨 내니 신장 4자9치의 여성이 머리를 산발한 채 얼굴을 위로 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엊어맞은 듯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
錄諺解)의 구타살해 조항과 너무 흡사한 시반이 나타났으므로 자살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 정수리 좌측에 피부가 벗겨진 상처도 있었다. 무언가로 되게 맞은 흔적이 분명했다. 점점 더 타살 혐의가 짙어졌다. 독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비녀 모양의 은으로 만든 뾰족한 도구를 입안에 넣어 색깔이 변하는지를 살폈으나 색이 변하지 않아 독살은 아닌 듯했다. 목 부위의 혈흔을 살펴보니 상처가 여러 군데 나 있었는데 목 졸린 흔적이 뚜렷했다. 갈비뼈와 가슴 부위도 얻어맞은 흔적이 있어 타살 혐의는 점점 더 짙어졌다. 시체를 뒤집어 보니, 등쪽 역시 전체적으로 피부색이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등 구타 흔적이 역력했다.
검시를 마치고 시장(屍帳) 3부를 작성했다. 하나는 죽은 황씨 부인의 집에 주고, 하나는 상부 보고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사또가 관아에 두고 참고할 것이었다.
검시 결과는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누가 범인인가? 일단 아무도 범행을 자백하지 않아 증거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시체는 곧바로 방 안에 다시 들여놓고 횟가루를 뿌려 훼손하지 못하도록 표시를 해 두고, 사람을 시켜 밤새 주변을 지키게 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위력
검시 내내 황씨 부인의 목에 일자(一字)로 난 상처를 미심쩍게 생각하던 문경군수 김영연은 '증수무원록언해'의 해당 조항을 꼼꼼히 읽었다. 시체의 목 뒤에 일자로 길게 난 상처는 주로 타살일 때 많으며 자살이라면 대개 목 앞에서 귀밑 쪽으로 사선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타살? 더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증수무원록언해'를 다시 살피던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목 매달아 자살한 경우 대들보나 서까래의 올가미 흔적은 한 줄이 아니다. 먼지가 많은 곳이라면 어지럽게 줄 자국이 흩어져 있어야 스스로 목을 맨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올가미 자국이 한 줄로만 나 있고 먼지가 어지럽혀져 있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맨 것이 아니다.'
그는 즉시 황씨 부인이 목을 맨 장소로 달려가 서까래 위에 단 한 줄의 자국만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목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게 분명했다. 그는 안재찬을 다그쳤다. "네 이놈, 네 처가 진정 자살을 했다 해도 슬픈 일이거늘 이렇게 아내를 때리고 목 졸라 죽여 서까래 위에 매달아 자살을 위장하다니 참으로 간악하구나. 꾸며댈 생각 말고 이실직고하라."
안재찬은 그제서야 범행 모두를 털어놓았다. 심지어 자신이 개 잡듯 올가미를 씌워 등에 짊어진 채 부인을 죽였다는 끔찍한 말까지 쏟아놓았다. "5월14일 정이문이 안방에 들어가려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처를 의심해 홍두깨로 때렸더니 그날 이후로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이달 초 2일 밤 제가 아들과 함께 자는데 애 우는 소리가 나서 처를 살펴보니 거의 죽을 듯했습니다. 정이문에 대한 복수심에서 끈으로 아내의 목을 묶고 정이문의 집에 업고 가 서까래에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민 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황씨 부인의 죽음은 남편에 의한 살해로 밝혀졌다. 이제 달아난 정이문을 붙잡는 일만 남았다. 비록 정범은 아니더라도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므로 마땅히 그를 잡아 들여 벌주어야 했다. 정이문의 인상착의는 '용파(容 )'라 하여 검안 말미에 첨부됐다.
관성적 반상 구별과 출가외인 의식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반상의 구별이 유지되고 있었다. 안재찬이나 사건 처리를 맡은 문경군수 똑같이 '상놈의 도발'에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 안재찬은 아내를 죽여 양반 부녀의 절개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안씨 집안의 이름을 더럽히기보다 차라리 타성(他姓)의 죽음을 선택했다. 시집 간 딸의 죽음을 두고 친정 식구들을 소환해 증언을 듣거나 이들이 딸의 죽음에 항의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점도 흥미롭다. 다른 검안 진술에도 나타나듯 당시 시집 간 여자는 남의 식구라는 의식은 뿌리깊었다. 이미 20세기가 밝은 때였지만 오랜 전통은 근대의 도전에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던 셈이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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