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 날개가 균형 있게 발달해야 멀리 날 수 있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보혁 갈등을 풀고 보수와 진보가 공생하는 구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과업입니다. 진보적 세력의 집권 자체가 우리 사회의 성장이며 보수세력도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해야지요."같은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와 깊이가 다르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문민 정부'는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군사 쿠데타 위협을 제거했고 전격적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개혁 기치를 높이 들었다가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그리고는 대통령 측근과 아들 문제로 정권 기반이 마구 흔들려 허둥대야 했다. 그 5년을 공보처 장관으로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운 오인환(吳隣煥·64)씨라면 개혁과 위기관리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을 법하다.
그런데도 퇴임 이후 5년 반이 넘도록 그는 일절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1964년 한국일보에 입사, 편집국장과 주필에 이르기까지 28년의 언론인 생활을 통해 '신문기자는 글로 말한다'는 신조가 몸에 밴 때문일까. 아니나 다를까, 최근 역사비평서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열린책들)을 내면서야 오랜 침묵을 깼다. 54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무엇이 그를 역사로 이끌었을까.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신조로 삼아 왔습니다. 신문기자가 됐으면 신문기자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53세에 벌써 주필 2년 차여서 50대 중반이면 어차피 언론계를 떠나야 할 처지여서 정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나마 언론과 관계된 일을 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외도는 아니었습니다. 장관 퇴임 후 어떻게 일생일업에 충실할까를 생각하다가 역사를 취재해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역사 취재'란 말을 고집했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현상을 취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히스널리즘(history+journalism)이란 관점에서 역사를 심층취재했다"며 "현재의 정치를 취재하고 분석하듯, 과거를 취재하고 분석해 대중이 실감할 수 있는 역사의 진실을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오 전 장관은 책에서 태조∼정조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역사를 위기관리를 중심으로 살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심층 취재하는 동안 위기관리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했습니다. 조선 왕조는 여러 차례 위기관리에 실패했습니다. 선조 때의 임진왜란이나 인조 때의 병자호란은 대표적인 예이지요. 특히 위기의 실상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위기의 실체를 알아야 위기관리를 시작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아직 별로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도마에 올린 위기관리의 주체는 임금만이 아니다. 정치 실력자였던 당대의 신하들도 취재하고 비평했다. "조선왕조는 군신공치의 체제였습니다. 영명한 군주와 탁월한 경세가가 있을 때만 경제·사회적 발전이 있었지요. 우리나라는 경세가가 아쉬운 나라입니다. 천하와 위기를 관리할 능력을 겸비한 경세가를 발굴하고 키워야 합니다. 객관적 조건으로 보아 중국이나 일본보다 뛰어난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국제감각이 있는 젊고, 참신하고, 역동적인 지도자가 나와야지요."
오 전 장관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기회 포착과 위기관리에 능했던 왕으로 태종을 꼽으면서 "기회를 제때에 포착, 이를 체계화해 탄탄대로에 올린 그를 철저히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현재의 재신임 정국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길게 지적했다.
"현 정권은 500년래 최초의 진보적 정권입니다. 노 대통령은 상고 출신의 서민 대통령으로 어떤 의미에서건 비주류입니다. 따라서 주류, 즉 보수세력과의 대치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데 정면돌파로는 국면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 이래 정면돌파가 성공한 예가 없어요. 그런 역사적 이해가 있다면 포용과 공존의 정치를 모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다가 측근 비리와 야당의 발목잡기가 겹치자 재신임 카드를 던졌지요. 재신임을 받지 못하면 하야해야 하고 새로 선거를 해야 하는 등 정치·경제 위기를 부릅니다. 왜 그런 정치도박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재신임을 받더라도 권위와 힘, 참신성에 상처가 난 마당이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어요. 현재와 같은 갈등국면은 다시 옵니다. 나라 발전에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나라당도 역사적 맥락을 읽는다면 반대했어야지요. 여야가 공히 역사 인식 결여라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국가의 장래가 어둡습니다."
퇴임 이래 경기 용인시 수지의 아파트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써 온 그는 "순조 이후 구한말까지의 역사를 다룬 속편을 내후년까지 쓰고 그 후에 고려사도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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