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사회운동의 태두로 평가받는 서울YMCA가 28일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민족의 자주와 개화를 열망하던 기독청년들이 모여 1903년 '황성기독청년회'를 설립하면서 첫발을 내디딘 서울YMCA는 독립협회 해산 후 이상재, 윤치호, 조만식 등 민족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야학과 시국강연회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사회의식을 높이고 이들을 민족지도자로 키워내는 인재양성 기관으로 자리잡았다.
1912년부터 일제가 '105인 사건' 등으로 탄압을 시작했지만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을 선도했고 1922년부터 물산장려운동, 농촌강습소 개소운동 등으로 자립 경제 운동을 펼치고 YWCA 및 보이스카우트, 신간회 등의 단체도 지원, 창설했다.
일제 말 강제해산 및 6·25전쟁 중 회관 소실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1967년 회관을 재건하고 70년대 군부 독재가 실체를 드러내면서부터'YMCA 사회개발단'을 통해 운동의 활기를 되찾았다. 시민논단과 시민중계실, 양곡은행 등의 사업은 시민사회운동의 모범을 제시하며 이후 소비자운동, 민중운동으로 분화되어 갔다. 20여년간 양곡은행 자문위원으로 활동해 온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양곡은행은 고리대가 성행했던 농가 빈곤의 악순환을 극복하고 농가경제 향상의 기반을 마련했다"며"YMCA운동은 실천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80년대에는 인권과 정의를 옹호하고 부조리에 대항하는 보다 폭 넓은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외채문제해결, 건전소비촉구 등 사회병폐척결운동과 양담배 안피우기, 환경보존캠페인, 부정부패 추방운동 등에 나섰다. 1986년 YMCA 중등교사협회 소속 교사 600여명의 교육민주화선언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운동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수호 전교조 위원장은 "단체의 결성조차 어려웠던 80년대 초반 많은 서클들이 YMCA의 울타리 속에서 비합법 민주화 운동을 해 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정체성과 방향의 혼란을 겪기도 했고 지나친 수익추구와 외형확장으로 '회원 없는 회원운동'이라는 내부 비판을 받으며 진통을 겪기도 했다.
서울 YMCA는 그 동안의 갈등과 내분을 정리하고 창립 100주년을 맞아 YMCA 대학 설립을 통한 실무자 양성 운동 및 북한 YMCA 재건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박은형기자 voi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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