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디 붉은 단풍에 홀려 넋이 나갈 지경입니다. 광릉 숲은 지금 그 가을빛의 향연으로 마음을 잡아두기 어려울 정도지요. 모두들 단풍에만 눈이 가 있습니다.하지만 그 숲 안 나무들 사이에는 선명함이나 고운 붉은 빛이 단풍에 절대 뒤지지 않는 많은 열매들이 있습니다. 백당나무 열매는 이미 오래 전에 색깔을 드러냈고, 화살나무 열매들은 마치 잎이 붉은지 열매가 붉은지 내기를 하는 듯 합니다. 이제 곧 잎은 낙엽이 돼 사라지겠지만 열매 만큼은 오래 매달려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열매 빛깔로 치자면 독특한 것들이 아주 많지요. 보라색 작살나무도 특별하고, 자줏빛과 까만 열매가 멋지게 어우러진 누리장나무도 그러하고…. 그러나 누가 뭐래도 열매는 붉은 빛깔이 단연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연 속에는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없으니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선 붉은 색은 눈에 아주 잘 색깔입니다. 특히 단풍이 들기 전이나 자금우나 백량금처럼 상록수의 초록 잎새와 어우러진 모습은 대표적인 보색대비이지요. 이런 붉은 색은 사람의 눈에 뿐 아니라 새들의 눈길도 확실하게 끕니다. 흔히 투우를 할 때 붉은 색의 천을 휘날리지만 사실 소는 붉은 색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들은 사람처럼 아주 선명히 잘 봅니다.
그 근거로는 이른 봄 혹은 추운 겨울 동박새라는 새의 힘을 빌어 꽃가루받이를 하는 동백나무의 꽃잎이 얼마나 붉은 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고 하지요. 또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넣어 키우는 대표적인 탁란새인 뻐꾸기 새끼들을 보면, 먹이를 달라고 벌리는 입 속이 붉은색이랍니다. 어리숙한 가짜 어미들은 이 뻐꾸기 새끼들의 입속 붉은 색깔을 보면 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이지요.
나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붉은 빛깔로 어서 먹으라고 새들을 자극한 열매들은 새에게 삼켜지고, 대부분의 씨앗은 소화되지 않은 채 배설됩니다. 나무 중에는 그냥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면 씨앗이 잘 발아되지 않지만 새의 몸 속을 통과하면서 씨앗에 묻어 있던 발아억제 물질이 없어져, 혹은 모래주머니에 씨앗 껍질이 깎여 쉽게 싹이 틉니다. 왜 우리도 나무 씨앗을 심을 때 딱딱한 껍질을 가진 것은 표피에 상처를 내서 심지 않습니까. 같은 이치지만 자연에서는 새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요.
씨앗을 섞어서 배출된 배설물은 그 씨앗이 자라는데 필요한 양분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이에 씨앗은 부모나무와 양분과 볕을 경쟁해야 하는 운명을 피해, 그리고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동글동글 반질반질 아름답게 익어가는 빨갛고 붉은 열매들, 하도 탐스러워 하나 따서 입에 넣어보면 실망스럽게도 그리 맛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운 빛깔을 만들면서 맛을 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점점 짧아지는 가을 햇살처럼 지면이 다했으니 다시 한 주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 @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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