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선거 자금을 총괄했던 김영일 전 사무총장은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SK 100억원 비자금 수수에 대해 "법적·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은 의문투성이인 채 여전히 미궁 속에 갇혀있다. 사건의 핵심인 '누가 모금을 주도했나'라는 대목에 이르면, 겉으로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실제로는 서로에게 "당신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김 전 총장은 이날 "지난해 10월 중앙당 후원회를 앞두고 열린 대책회의가 비자금 모금을 협의하고 특정인에게 지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 회의는 김 전 총장을 비롯, 최돈웅 나오연 김기배 하순봉 이상득 의원 등 당시 실세가 모두 참여한 회의였다. 그런데 김 전 총장은 이 회의가 비자금 모금을 주도한 주체가 아니었겠느냐는 세간의 의구심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김 전총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내가 자금 수수를 주도했다면 벌써 검찰에 소환됐을 것"이라며 "최돈웅 의원이 고교동기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앞장서서 미친 듯 뛰었다"고 주장했다. SK비자금에 관한 한 자신이나 실세그룹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 최 의원 주도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 의원은 자신은 독촉역 내지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 의원은 "당에서 연락이 와서 SK측으로부터 돈을 받아 재정국에 넘겼을 뿐이다", "당에서 이미 접촉을 해둔 상태에서 독촉 전화만했다"고 주장, 김 전 총장을 사실상 직접 겨냥하고 있다.
김 전 총장의 '윗선'이 모금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최소한 사후에 인지했는지 여부도 여전히 의문이다. 김 전 총장은 이날 "당시 이회창 후보는 자금의 모금과 집행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며 선을 그었다.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보고 및 인지여부에 대해서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에 주목해 달라"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전인 24일 "내가 어느 선까지 얘기하느냐에 따라 파장이 달라진다" "대선자금 집행은 당의 선거관련 업무이므로 윗선과 상의한 것 아니겠느냐"며 '윗선'개입을 암시하는 말을 흘렸던 그다. 이날 이회창 전 총재쪽으로 불길이 옮아가는 것을 돌연 차단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다급한 재정사정에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고 집행했다"는 김 전 총장의 이날 회견문 발언도 의문이다. 이미 대선과정에 SK로부터 온 100억원이 불법 자금임을 알았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표나 후보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명백한 불법 자금을 집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