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교육비, 아파트값 폭등 등 여러 민생 문제의 원인으로 '고교 평준화' 가 거론되고 있다. 경제계 등 일각에서는 사교육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실패한' 평준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왜 하필 이 시점에서 고교 평준화 문제를 다시 들먹거리는 것일까. 이는 교육에 관해서는 국민 누구나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어떤 난제로 국가적 논란이 빚어질 때 그것을 '요술방망이'처럼 써먹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고교 평준화를 둘러싼 쟁점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평준화로 인해 학력이 떨어지고 국가 경쟁력도 후퇴했다는 것이다. 반면, 평준화 덕분에 초·중학생의 입시 부담이 해소되고 교육 정상화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주장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양쪽 모두 타당한 논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한국의 15세 학생들은 과학 1위, 수학 2위, 읽기 6위 등 최상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상위 5%의 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는 과학 5위, 수학 6위, 읽기 20위에 그쳤다. 같은 해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게 나왔다. 전체적으로 평준화 지역의 학력이 비평준화 지역보다 우수하거나 비슷하지만,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평준화 지역이 비평준화 지역에 비해 약간 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다. 지난 30년간 실시한 평준화 정책은 일반적인 학력 성취에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국가기간인력이 되어야 할 우수 인재 육성에는 적지 않은 허점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1974년 처음 실시한 고교 평준화 정책은 지난 개발연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보화, 세계경쟁 등이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는 1974년식 평준화 논리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새로운 틀로서의 고교 평준화, 나아가서는 새로운 틀로서의 고교 체제가 거론되어야 한다.
고교 평준화에 대해 국민들은 복잡한 생각과 심경을 보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평준화 찬반을 묻는 것 외에 현행 고교 평준화 체제를 보완해야 한다는 제3안을 제시하면, 이 대안에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는 현상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현행 고교 평준화가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해야 한다는 공감대일 것이다.
교육체제 개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고 우수 인재를 양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시·도에 비해 이미 엄청난 교육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서울 지역에 특목고, 자립고 등을 몇 개 더 세우는 방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서울의 경우는 현재의 교육을 각 학생 수준에 맞게 충실화하는 '교실수업 개혁'을 통해 평준화의 후유증을 극복해야 한다.
고교 평준화 적용 여부는 지역 상황에 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농어촌 교육을 배려해야 하고, 자생력 있는 사립 학교가 자신의 건학 이념에 따라 교육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초 설립취지와 달리 입시 위주 명문학교로 인식되어버린 지금의 특수목적고의 문제점도 개선해야 한다.
최근 정년 퇴임한 어떤 교장 선생님은 필자에게 이런 전화를 주셨다. " 고교 평준화의 문제점은 너무 많아서 어느 한 군데 손 보지 않아도 될 곳이 없다. 그렇지만 공교육을 신뢰하는 방향에서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면 현재 학교가 해야 할 일은 본래의 교육목적과 내용에 충실해지는 방법 밖에 없다. 수준별 이동수업 등 학교교육이 할 수 있는 기능을 정상화해서 아이들에게 접근하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학원보다 경쟁력 있는 학교, 예전의 명성을 살릴 수 있는 학교가 되지 않을까…"
/윤 종 혁 한국교육개발원 고교체제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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