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H사에 근무하는 한모씨는 며칠 전 디지털 카메라 덕을 톡톡히 봤다. 중요한 내용이 적힌 수첩을 집에 두고 출근해 당황하다가 디지털 카메라로 그 내용을 찍어 회사로 '순간이동'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이전 같으면 돈을 들여 퀵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직접 집에 갔다오는 번거러움를 감수해야 했겠죠. 하지만 집사람에게 '주요 내용이 적힌 수첩 면을 바닥에 펼쳐놓고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후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더니 10분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건국대 미생물공학과 2학년 김희영(20)씨는 디지털 카메라를 알게 되면서 리포트 작성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말한다. 과 특성상 각종 실험 결과를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한 눈으로 현미경을 보며 어렵게 손으로 그리던 것을 디지털 카메라 접사(接寫) 기능으로 바로 찍어 첨부하니 시간도 시간이지만 정확도가 훨씬 좋아졌다.
"외국 책에 나온 각종 분자 모형이나 분석 프로그램은 복잡한 컬러인 경우가 많아서 복사기로는 소용이 없었어요. 요즘에는 도서관에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간단히 해결하죠."
홍보 대행사 프레인은 몇 달 전부터 아르바이트생의 신분증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보관한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생의 급여를 처리할 때마다 담당자 책상 한쪽에 잔뜩 쌓인 서류철을 뒤적이는 소란이 없어졌다. 간단한 검색으로 이름별로 정리된 파일을 찾기만 하면 되므로 손 가는 일이 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디카'가 기록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소형 텔레비전 한대 정도의 가격,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 최첨단 장난감 같은 재미있는 모양. 디지털 카메라가 2003년 한국사회에 '디카족'이란 신조어를 낳으면서 놀이문화와 기록문화의 패러다임을 급속히 바꾸고 있다. 기존의 카메라에 디지털이라는 기술을 결합한 이 기계는 노래방과 컴퓨터 게임 외에는 놀 곳을 몰라 헤매던 많은 이들에게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즐거움을 선사하며 승승장구 한다.
재미뿐 아니다. 필름 카메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선명한 화질과 상상을 뛰어넘는 간편성으로 학교와 연구소, 그리고 취재현장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카메라의 영역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또 그 동안 기계라면 손사래를 치던 여성 소비자까지 마니아로 끌어들였다.
칠판을 보며 노트에 필기를 하느라 허둥대던 대학생들은 이제 아예 칠판을 통째로 찍어간다. 교수들도 과제 관리에 디지털카메라를 십분 활용한다. H대 건축학과 김모(26)씨는 "지난 학기부터 도면같은 시각물을 제출할 때 반 전체의 과제 수십 장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CD 한 장에 모아 제출하는 일이 잦아졌다"며 "교수님들도 분실할 위험도 적고 정리하기도 편하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찍고 올리고 답글 달고
디지털 카메라를 품에 안고 사는 소위 '디카족'. 밥을 먹으나 차를 타나 친구를 만나나 일상의 작은 조각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는다. 이들은 특별히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사진을 찍고, 또 이를 컴퓨터에 올리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
디카족이 디지털 사진을 갖고 노는 놀이터는 단연 인터넷이다. 웹서핑을 하다 보면 밤낮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디지털 사진을 손봐 올리고 남들이 찍은 사진에 답글을 다는 이른바 '디카 폐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엽기' '폐인' '아 ' 등의 유형어를 만들어내며 디카족을 육성해온 것으로 평가 받는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 밤 12시부터 시작된 '출첵(출석체크)'은 새벽까지 이어진다. '출첵'은 답글을 통해 자신이 사이트에 있음을 알리는 일. 밤새 쉴 틈 없이 올라오는 디지털 사진에 대한 답글은 처음 것이 올라오기 무섭게 수십 개씩 꼬리를 문다.
디시인사이드 박진홍 팀장은 "반시간만 사이트를 보지 않으면 이전 것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업데이트 속도가 빠르다"며 "오프라인 모임 등을 통해 만나본 이른바 '폐인'들은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나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디지털 사진의 보편화는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인터넷 개인 미디어)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종전에 홈페이지를 운영하기 위해서 갖고 있는 사진을 일일이 스캔해야 하는 일이 번거로웠다면 디지털 카메라는 별다른 기술이나 컨텐츠가 없이도 홈페이지를 재미있게 꾸밀 수 있도록 해준다.
'재미있는 재임스(blog.naver.com/favedesign)'라는 와인 관련 블로그를 운영하는 웹기획자 김성훈(31)씨는 "사진을 활용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며 "남의 일상을 구경하면서 사람이 사는 다양한 모습을 엿보는 것도 재미"라고 말했다.
디지털 사진만이 갖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촬영 후의 작업이다. 포토샵 등 그래픽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의 잡티를 지우고 색감을 선명하게 하는 것은 기본. 두개의 사진, 혹은 사진과 기존의 다른 시각물을 합쳐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각종 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팬카페(cafe.daum.net/ddalgirl)에 1만7,000명이 넘는 회원수를 갖고 있는 '딸녀'. 누가 찍었는지,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의 '딸녀'는 사진 자체로도 화제를 낳았지만 얼굴 부위만 떼내어 다른 사진에 붙인 다양한 합성사진을 통해 선풍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외에도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 역할을 맡았던 영화배우 최민식의 얼굴도 '승업 자'라는 별명을 업고 합성사진에 흔히 등장하는 얼굴이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