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과 5월 극심한 파병 찬반논란 속에 이라크로 떠났던 건설공병지원단 서희부대와 의료지원단 제마부대 1진 병력이 2진과의 인수인계를 끝내고 23일 귀국했다. 6개월간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 주둔한 서희·제마부대 장병들은 강한 모래바람에 단련된 탓인지 초겨울을 방불케하는 서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서울공항 도착행사를 마친 뒤 신체검사를 위해 곧바로 수도통합병원으로 떠났다. 부대원 575명을 이끈 서희부대장 정광춘(49·육사 32기) 대령과 100명을 통솔한 제마부대장 김용규(43·육사 39기) 중령은 "현지 주민들이 미국과 이탈리아군은 점령군으로 생각하는 반면 한국군에게는 정서적으로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군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다"고 강조했다. 서울공항에서 만난 이들은 파병 부대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소상히 답했지만, 전투병 지원 등 추가 파병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했다.―활동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성과는.
(정광춘·이하 정) "초등학교 보수공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책상과 의자, 칠판, 급수시설이 폐허 상태였다. 아이들이 바로 공부할 수 있게 돼 보람을 느꼈다. 오폐수 처리시설은 있었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 30년 동안 시아파에 대한 지원이 되지 않아 모두 녹슬고 폐물이 돼 있었다. 온 동네에 악취도 넘쳤고, 심지어 두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오폐수에 묻혀 있기도 했는데 모두 보수했다."
―서희부대가 대규모 공사도 맡았나.
(정) "서희부대의 공사능력이 크지는 않았다. 보수나 소규모 건물 신축 정도였는데 우리 능력을 다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자금 범위 내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하고 싶었던 만큼 최대한 다 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점도 많았을 텐데.
(김용규 중령·이하 김) "처음에는 순회진료 위주로 많은 인원을 진료하느라 1차 진료밖에 못해 안타까웠다. 다행히 7월12일 병원 개원한 다음에는 충실히 진료했다. 진료 예약제를 실시했는데 2개월 진료가 예약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정성스럽게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청했다."
―장병 사기진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김)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여건이 불비하면 노력을 배가하고,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하라'는 말이 생각났다. 주저앉을 수도 없고,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개척을 해나갔다. 다행히 본국에서 많은 지원을 해줘서 5월말에는 텐트에 에어컨, 냉장고 등이 잘 갖춰졌다. 지역이 워낙 열악하기 때문에 체력단련도 많이 했다. 계급간에 많은 대화를 했고, 오해도 해소했다."
(정) "사기와 군기를 동시에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열악한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을 키워야 군기와 사기가 유지된다고 봤다. 가능한 휴식과 휴무를 최대한 보장하고, 단체운동, 단체활동을 통해 체력도 키우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중대별로 체력 단련장을 설치해 여가시간에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체력을 통한 악조건 극복에 중점을 뒀고, 간부들이 모범을 보이도록 했다."
―현지에 공병과 의료 지원을 더 늘려야 하나.
(정) "우리가 활동한 수준이면 적절한 것 아니겠나."
―경비부대가 더 필요하지는 않은가.
(정) "현재 경비 인력은 적정 수준이다. 남부는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탈리아 여단의 경비·경계 지원을 받았는데 협조는 원활히 이뤄졌나.
(정) "서희·제마부대는 미국의 통제를 받았지만 현지 책임을 지고 있던 이탈리아와 협조 관계였다. 우리는 이탈리아가 요구하는 공사를 도와주고, 이탈리아는 전반적인 경계·경호를 해주면서, 적대세력에 대한 정보를 매일 제공해줬다."
―추가 파병에 따라 서희·제마부대가 북부 모술(추가파병시 주둔 후보지)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는데.
"추가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김) "적응이 됐어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쉴새 없이 모래바람이 일기 때문에 악조건 속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현지 주민과의 의사 소통도 문제였는데 현지인 아랍어-영어 통역원이 도움을 줬고, 많은 부대원이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됐다."
―아랍어 통역병이 부족해서 힘들지 않았나.
(정) "서희부대는 6명, 제마부대는 5명의 통역원을 고용했는데 통역요원 월급은 미군과 임시통치기구에서 지급했다. 우리가 소요를 올리면 다 선발해 줬다. 통역병이 부족했다는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던 한국군만의 강점이 뭔가.
(김) "처음에 미군이 순회진료를 하던 곳을 인수 받았는데 미군은 주민들을 땡볕에 진료를 받도록 했었다. 우리는 즉시 그늘막과 깔판을 설치해서 주민들이 앉아서 대기할 수 있도록 했더니 한 이라크 주민이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며 감사를 표시했다. 여자 환자를 남자군의관이 진료하는데 대해 걱정이 많았는데 현지에 와보니 병원에서는 다 허용이 됐다."
(정) "나시리야 지역 주민들이 반(反) 사담 후세인이었던 시아파가 대부분이어서 기본적으로 동맹군에게 우호적이었다. 한국군과 이라크인과는 정서적으로 친근한 요소가 있었다. 이탈리아와 미국은 서양인으로, 한국인은 같은 동양사람이어서 친근감을 갖고 접근을 했다. 과거 현대건설이 쌓았던 성실한 이미지도 한국군에 대한 우호적 시각으로 작용했다. 신세대 장병들도 50년 전 한국전 폐허 위에서 일어났다는 잠재 의식을 갖고 있어서 이라크 주민들의 헐벗고 굶주린 모습을 보면 뭐든 다 주려는 마음이 우러나온다고 했다. 이런 마음이 주민들에게 전달이 됐다."
―다른 나라 군대와는 어떤 점이 달랐나.
(정) "이탈리아나 미군은 하나의 점령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은 무력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달랐다. 주민들은 한국사람은 진정한 친구, 평화의 전도사라고 생각하면서 '치안도 한국군이 맡아주면 좋겠다'고 요청할 정도로 신뢰가 쌓였다."
―새로 임무를 시작하는 2진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정) "우리 국민과 미군과 이라크인이 원하는 공통분모에 충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건강은 개인 임무인 동시에 국민에 대한 소명이다. 공식임무로 본다면 동맹군인 미군, 이탈리아군, 루마니아군, 영국군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고, 한국군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되 이라크인을 존경하고, 친구가 돼야 한다. 기분 내키는 대로 도와주는 것보다는 현지 주민들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김) "현지에는 전쟁 희생자보다 만성질환자가 많았다. 임무수행하면서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임무 수행하기 전에 안전문제를 위해 사전에 정찰조를 보내 확인을 하고 이상이 없을 때 활동을 했다. 절대 이라크인을 무시하는 언행을 해서는 안 된다."
―이라크전이 미국의 추악한 전쟁이라는 평가도 있지 않나.
(김) "우리가 활동하는데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리 한국군이 와서 의료, 건설 지원을 하는 사실을 다들 좋아했다. 미군과 연계해서 얘기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대담=김정호기자 azure@hk.co.kr
정광춘 대령
서희부대를 이끈 정광춘 대령은 육사(32기)를 나와 8사단 포병연대장과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처 화력지원과장, 1군지사 지휘통신 차장을 거쳤다. 정 대령은 처음에는 이라크전 연합합동군사령부 한국군 협조단장으로 파견됐으나, 지난 8월 강압적인 지휘스타일로 전임 서희부대장이 전격 경질된 후 부대를 맡아 2개월 반 동안 재임했다.
김용규 중령
제마부대를 이끈 김용규 중령은 육사(39기)를 졸업한 뒤 특전사 작전계획장교, 17사단 작전참모 등을 거쳤다. 95년에는 그루지아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본부 감시단 요원으로 근무했던 파병 유경험자이기도 하다. 김 중령은 의무 병과가 아닌 보병 병과이면서도 의료지원단의 대민 봉사와 인도주의적 활동을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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