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던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가 일단락이 났다. 유엔에서 이라크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한국 정부가 신속하게 파병결정을 내린 것이다. 국민여론을 모아 신중하게 결정하겠다며 그렇게 뜸을 들이던 정부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전격적으로 파병결정을 내린 데는 나름의 고충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포 이상을 끈 문제가 너무 싱겁게 아니 너무 허망하게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금치 못하고 있다.파병결정을 내리게 된 과정과 배경을 반추해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9월 초 미국이 추가파병을 요청한 이후 한국 정부의 초기 입장은 '국가이익을 고려한 신중한 결정 방침'이었다. 특히 북핵 문제라는 '발등의 불'이 있는 이상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감안하지 않고 병력을 추가파병하는 것은 힘들지 않겠냐는 것이 대부분의 판단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도 같은 맥락이었고 9월 말 윤영관 외교부 장관이 파월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추가파병과 북핵의 연계론'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반발은 예상외로 강력했고 한국 정부에 무언의 압력이 가해졌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한국방문이 연기되었고 부시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 길에 한국은 제외되었다. 미국의 체감온도를 가장 빠르게 알아챈 한승주 주미대사는 북핵 연계론을 비판하면서 '조건 없는 파병'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대통령의 친서까지 보내면서 미국 정부를 달랬다.
특정 사안에 대해 양국이 입장차이를 보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정부가 추가파병 문제를 결정하는 데는 단순히 한미동맹의 원칙 말고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그리고 파병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뿐 아니라 우리 장병의 희생 등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미국의 반발과 압력이 전달되자마자 아무런 설명이나 공론화 과정 없이 서둘러 추가파병을 결정한 것은 아무리 봐도 굴욕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파병결정을 하기 전날 대통령이 시민단체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도 신중한 입장을 표명하더니 곧바로 그날 저녁 4당 대표에게 파병결정을 통보하고 나선 것은 해도해도 너무 지나쳤다. 심히 고심하는 듯 하던 정부가 유엔 결의안 통과와 파병찬성 여론을 들어 파병결정으로 선회하는 모습은 그동안의 진행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허망함 외에 다른 설명은 구차할 뿐이었다.
신속한 파병결정을 통해 바로 며칠 후에 열리게 되어 있는 한미정상회담에서 나름의 미국 양보를 얻어내려고 했다는 사후설명도 지금 와서 평가해보면 그렇게 유용하지는 않다. 부시 대통령이 양보했다는 '대북 다자 안전보장'이라는 것이 과연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와 파병 결정의 허망함을 충분히 상쇄할 만한 대단한 성과였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다자틀 내에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은 이미 미국 행정부 관리들의 입을 통해서 거론되었던 것이고 북한은 예상했던 대로 '가소로운 일'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그간 부시 대통령의 행적을 돌이켜 볼 때 그의 입장변화가 과연 의미있는 정책변경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미정상회담 직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공동성명에 북한의 핵폐기 내용을 포함하자는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는 다시 한번 그의 본심을 의심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미동맹의 구조 속에서 미국의 요구를 뿌리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추가파병과 같은 중대한 국가현안에 대해서는 적어도 정부가 당당함을 견지해야 하고 설사 미국 입장에 따르는 결정을 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의 투명성과 정직함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숨죽이며 정부의 결정을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허망함만을 안겨준 이번 결정은 한미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도 씁쓸하다.
김 근 식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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