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을 시인한다. 그리고 얼마 후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그레그 전 미대사는 강석주 당시 외무성 부부장을 만나 앞서 켈리 방북 때의 회담 내용에 대해 묻는다. 이에 강석주는 "나는 그 계획(우라늄농축)을 몰랐다. 계획을 아는 자들을 모아서 어떻게 대답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켈리에게 북한은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무기라도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북한은 이때 부시 정부의 대북 압살정책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논리를 내놓은 셈이다. 대북 압살정책이 포기되어야만 핵개발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석주는 그 당시 김정일의 참석 여부에 관해 "상상에 맡긴다"고 했다. 결국 북한은 이라크 다음 목표가 자신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핵개발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대미 교섭의 카드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강석주는 그레그에게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불가침 보장을 전제로 고위급 회담을 연다면 미국의 핵에 관한 우려에 대해 대답을 준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북한 외무성도 켈리 방북직후 북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한다면, 미국의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후 북한은 핵동결을 해제하고 핵보유와 실험을 운운하는 등 벼랑끝 외교로 치달으면서 미국이 불가침 약속을 해야만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핵계획을 폐기해야만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제기하는 핵포기 조건에 대해 전향적으로 응했다. 북한이 요구하는 북미 불가침 협정은 국내적 제약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국을 포함한 다자틀 내에서 안전보장을 문서로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향후 관련국들과의 협의를 통해 구체화되겠지만, 주권과 안전을 보장받고 핵무기를 포기한 우크라이나 방식을 원용한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즉 6자회담 참가국인 미국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5개국이 북한에 대한 공동 안전보장을 문서로 제공하며 이를 미의회가 승인하는 방안이다. 이 같은 '5자 연대 안전보장' 제안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중대한 돌파구가 마련됐다.
이제 공은 북한에게 넘어갔다. 북한은 부시 정부의 강경한 대북 압살정책으로 인하여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고 핵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해왔다. 미국은 바로 그 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다. 만약 북한이 이것에 응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한다면, 그간의 논리는 무색해지며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확실해진다. 미국의 새로운 접근에 대한 북한의 반응 여하는 북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대한 고비가 된다. 실패할 경우 국제사회는 '불가침 보장' 운운은 핑계일 뿐 북한의 의도는 핵무장 자체에 있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미국의 새 제안으로 6자회담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2차 6자회담은 대화의 모멘텀이 형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회담이 될 것이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시간적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제안에 북한이 전향적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회담은 좌초할 가능성이 높고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대북 제재로 흐르게 될 것이다. 북한은 지난 20년간 핵확산금지조약,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북미 제네바 합의 등 국제사회와 세 차례에 걸쳐 상당한 대가를 받고 핵포기를 약속했지만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번이 북한에게 마지막 기회라는 느낌이 든다.
윤 덕 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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