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신임 정국이 혼미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내 국민투표 제안에 대해 야당이 비판적 입장을 보인데다가 노 대통령도 이 문제를 정치권과 협의해 정치적으로 타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 같은 움직임과 별개로 개혁적 사회단체들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실종 문제를 재신임과 연계시키겠다고 나서 주목을 끌고 있다. 즉, 재신임 문제가 터져 나오자 반전평화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라크 파병, 새만금 공사와 핵폐기장 설치, 재벌 개혁, 노동문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 등 노무현 정부의 개혁실종을 심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은 야당과 일부 언론의 발목잡기로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재신임 투표에 따른 국정혼란 우려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국정혼란이 더 하겠느냐"고 반문한 바 있다. 일리가 있고 이해되는 바가 적지 않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전혀 아니올시다' 이다.
이라크 파병과 대미관계, 재벌개혁, 환경, 노동, NEIS로 상징되는 인권문제 등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볼 때 노 대통령은 결코 야당과 수구언론에 발목을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격려와 박수를 받으며 이들과 사실상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지지했던 개혁세력에 등을 돌리는 정책을 펴왔다.
노동관계에서는 정부출범 초기에 다른 정권들과 무언가 다를 것 같은 기대를 주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면서 오히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노동운동을 대기업 위주의 노동귀족으로 몰아 부치며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을 벌였다.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할 때 사회단체들이 개혁실종을 재신임과 연계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주말에 있었던 두 사건은 특히 충격적이다. 하나는 노무현 정부가 날치기식으로 이라크 추가파병을 전격 결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장이 노동탄압에 분노해 자살한 것이다. 두 사건은 한마디로, 국제정책과 국내정책에서의 개혁실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라크 추가파병은 파병도 파병이지만 그 과정을 보면 정말 참담해진다. 파병 발표 5일전 노 대통령은 국회시정연설에서 파병을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또 사회단체들이 '19일께 파병을 결정할 것'이라는 일부 보도내용을 들어 17일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과의 회동을 취소하려 하자 청와대는 그 보도는 오보라며 모임을 성사시켰다. 이 면담석상에서 노 대통령은 19일 파병이 결정될 것이라는 보도내용을 추측성 보도라고 부인했다. 그리고서는 바로 다음 날 파병을 결정했다. 사회단체들을 들러리로 만들고 결정과정의 국민참여는 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가 아니라 '참여없는 참전정부'일 따름임을 스스로 보여줬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자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대기업의 강성 노조가 나라를 망치는 노동귀족이라는 노 대통령의 그릇된 노조관에 죽음으로 항거하고 있는 그의 유서는 재벌과 노 대통령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팔십 몇 만원에, 근무연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더 쪼들리는 앞날은 막막…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노동현실도 잘 모르면서 노조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아우성을 쳐 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몬 바로 그 정치인들과 측근들은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부정한 돈을 받아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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