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드레스 차림의 고혹적인 여인, '몽정기'에서 뭇 중학생을 잠 못 이루게 한 섹시한 여인상. 그러나 어깨가 살짝 파인 티셔츠를 입은 모습은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의 '백조' 미영이었다. "더 어깨를 파드릴까요. 쇄골이 나와야 되는데…." 카메라 앞에서 날아갈 듯한 미소를 짓는다. 시원시원한 말투다.미영이는 나의 대변인
여자 채플린이 탄생했다. 고작 다섯 편째 영화에서 김선아(28)는 솔직하고 화통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취직이 될까, 살을 뺄까를 고민하는 살아 있는 캐릭터를 빚어냈다. 만취해서 여관에서 일어난 영화 속의 부스스한 머리 모양은 화장기 없는 진짜 얼굴 그대로다.
"저라고 왜 예뻐 보이고 싶지 않았겠어요. 막상 시사회에서 봤을 때는 얼굴이 너무 푸석푸석해서 걱정이 됐어요." 올 코미디 영화가 건진 단연 빼어난 여성 캐릭터다. "거리낌 없이 내 속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미영이는 나의 대변인이에요."
탤런트를 꿈꾸는 미영은 놀아도 훌라후프를 하고, 걸레질을 해도 복대를 하는 더 고칠 것도 없는 백조 자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조인 적은 한 번도 없고, "미국에선 한 달에 10달러로 살았어요. 카레집에서 웨이트리스로 6개월 일해 보기도 하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해봤지만 놀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자립형이다.
입에 달라 붙는 대사의 힘
사실 '황산벌'에서 계백의 처로 딱 한 장면에 나왔지만 이미 김선아의 숙성된 연기력은 검증을 거쳤다. 코믹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비장한 분위기로 바꿔버린 진한 목포 사투리는 무려 3개월이나 꼬박 매달려 목포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를 녹음한 뒤 따라 한 결과였다.
이번엔 리듬과 타이밍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어머니(김수미)와 탁구공 주고 받듯 내뱉는 대사의 맛도 쫄깃쫄깃하지만, 임창정과 벌이는 시소타기 같은 대사는 점입가경이다. 임창정이 '밤길 조심하고'라고 던지면 '대낮부터 조심허고'라고 받는 티격태격 대목은 사소한 예에 불과하다. "내가 만든 대사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건 만취한 뒤 깨어서 '엄마, 물 좀 줘'예요. 술 먹고 나면 물 찾게 되지 않나요?"
시사회 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너무 얼떨떨하다"는 그는 '위대한 유산' 시나리오를 본 뒤 "이 영화 아니면 죽을 것 같아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고 털어 놓았다. 2년 전만 해도 그녀에게 따라다녔던 어색한 한국말과 대사 탓에 하마터면 캐스팅되지 못할 뻔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10대와 20대 초반 시절을 보냈다.
영화는 나의 놀이터
피자 광고로 친숙한 이미지를 심은 이후 탤런트, MC로 바쁘게 지냈지만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난 뒤 "하고 싶은 걸 하니까 더 잘 하게 되는" 이상한 역설을 체험했고, 연예계 데뷔 후 6년 만에 처음으로 만족을 느꼈다. "감독님이 영화를 놀이터처럼 만들어 주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죠."
피겨 스케이트 전국체전 메달리스트 출신의 단단하고도 섹시한 몸매, 처진 눈꼬리와 도톰한 입술이 주는 친숙한 누이 같은 느낌에 이젠 자연스런 연기력까지 보탰다. 스태프 생일을 일일이 챙기고, 게다가 스태프 모두에게 사인을 한 머그잔을 돌리며, 매니저와 영화사와 친구를 위해 생일잔치를 세 번씩이나 치르는 부지런까지. 이제 그녀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듯하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 홍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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