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를 격퇴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가 전쟁의 와중에서도 틈틈이 '난중일기'를 꼼꼼히 적어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일기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떻게 장병들의 목을 베어 문란한 군기를 수습하였으며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적함을 여하히 바다에 잠재웠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그는 봉건 국가의 무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물이었다.문제는 이 '난중일기'에 배어있는 무인의 멘털리티가 근대 이후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이다. 박정희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드높이고 세종로에 동상을 건립하고 은근히 그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지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같은 수사와 백의종군, 명량해전의 서사는 이후 많은 정치가들의 엉뚱한 모범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그렇게 멋있으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협잡꾼과 궤변론자들, 갑남을녀와 극단주의자들이 지루한 논쟁과 타협을 거쳐 차선과 차악을 선택하는 구질구질한 시스템이며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묘한 체제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삼국지'를 읽고 정치가의 상당수가 이순신의 서사에 매료되는 시대는 과연 근대일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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