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6월 방한 때 첫 만찬을 정부측 인사가 아닌 조영식(82) 경희학원장 가족과 함께 해 세간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다. 사실 여기에는 사적인 관계가 작용했다.아로요 대통령의 당시 이례적 일정은 선친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 제 9대 대통령과 조영식씨 집안과 2대에 걸친 40년간의 인연 때문이다.두 집안의 인연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40대 초반의 조영식 당시 경희대 총장은 세계 각국의 명문 대학을 찾아 나선다. 경희대를 세계적 대학으로 우뚝 세울 청사진을 그려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시절 한국과 경희대의 초라한 위상 때문이었을까, 유럽의 대학 총장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조 학원장을 만나주지 않았다.
"허탈했습니다. 한국의 위상을 실감했지요." 세계 명문 대학의 높은 벽을 절감한 조 총장은 아시아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해 여름 조 학원장은 마닐라여자대학 등에서 세계 평화를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아시아 두 번째 부국(富國)인 필리핀을 방문하면서 '행운'을 얻는다. 마닐라여자대학 총장의 소개로 마카파갈 필리핀 대통령을 예방하게 된 것.
조 학원장과 마카파갈 대통령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고, 그 인연은 2세로 이어진다.
"마카파갈 대통령을 만나 세계 평화운동을 위해 '아시아대학 총장협의회'를 결성하겠다고 설명했죠. 그랬더니 마카파갈 대통령은 '앞으로 세계평화문제는 지구촌의 영원한 과제가 될 것'이라며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더군요." 유럽대학에서 문전박대 당했던 조 학원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50대 중반의 마카파갈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조 학원장에게 아시아대학 총장협의회를 세계대학 총장협의회로 확대할 것을 권유하며 창립총회를 세계적인 명문대학에서 개최하면 호응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5년 세계대학총장협의회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세계 180여개 대학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화려하게 탄생했다.
조 학원장은 마카파갈 대통령이 퇴임한 이듬해인 66년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주기 위해 가족들 함께 한국으로 초청한다. 가족간 만남으로 대학 1학년이었던 조 학원장의 장남 조정원 현 경희대 총장과 같은 또래의 아로요 현 필리핀 대통령과의 2대에 걸친 인연도 시작됐다.
그로부터 조 학원장과 마카파갈 대통령은 '바늘과 실'처럼 하나가 됐다. 조 학원장이 78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범한 '밝은 사회 국제클럽' 결성 때는 물론 81년 코스타리카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날' 행사 등 굵직한 국제회의 때마다 마카파갈은 조 학원장의 곁을 지켰다. 특히 86년 조 학원장의 발의로 유엔이 '세계 평화의 해'를 제정할 때 마카파갈 대통령은 세계 각국 지도자들을 만나 이를 설명하는 등 탁월한 외교력으로 조 학원장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98년 조 학원장은 마카파갈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눈물로 애도하는 필리핀 국민들을 보면서 그는 필리핀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2001년에는 마닐라에서 낭보가 전해진다. 조 학원장이 친딸처럼 여긴 아로요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달 필리핀에서 '네오르네상스를 통한 지구 공동사회 구현'을 주제로 개최된 제 22회 세계평화의 날 기념 국제평화학술대회 및 2003 밝은사회국제클럽 연차대회에 참석해 선대로 거슬러가는 깊은 인연과 의리를 보여주었다.
조 학원장은 "마카파갈 대통령은 어려웠던 시절 나를 세계 무대로 인도해준 후원자이자 지지자였다"면서 "그와의 만남이 2세간의 교류, 양국간 협력확대로도 연결된 만큼 지금은 그리 넉넉치 않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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