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 후 1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해온 H대 최모(24)군은 9월 900여명에 가까운 지원자가 몰려든 가운데 치러진 사법고시반 입반 시험에 합격했다. 그동안 신림동 고시촌에서 생활해온 그는 "학교에서 특강, 기숙사, 장학금 등을 지원받을 경우 실질적으로 매달 80만∼1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아낄 수 있는 셈"이라며 "고시실이 배정돼 매일 아침 도서관 자리를 맡는 수고도 덜 수 있고 정보제공 등 각종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입반시험 경쟁률 또한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대학 졸업자들의 취업난이 더욱 가중되는 가운데 각 대학들이 고시 합격자 수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지원을 확대하고 있어 '고시열풍'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일부 대학은 경쟁 대학에 뒤처질까 봐 울며 겨자먹기로 지원 확대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관계자는 "고시반 공간 마련에만 최소 1인당 300여만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며 "대학들이 고시반 예산 공개를 꺼리지만 올해도 대부분이 지원 예산을 대폭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독서실, 자료실, 체력단련실 등을 갖춘 국가고시동을 포함해 1,000여석 규모의 고시반을 운영인 연세대는 지난해 9월부터 교내에 흩어져 있는 11개 고시반을 통합, 국가고시 준비 학생들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가고시정보센터를 설립했다. 국가고시 1차 합격자에겐 학교측에서 자체 심사를 거쳐 1회 80만원을, 사법고시의 경우엔 동문회에서 매학기 100만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백태승 국가고시정보센터 소장은 "고시지원 확대 이후 매년 합격생들이 늘고 있다"며 "가뜩이나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학교측이 국가고시 준비생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법대학생회 관계자는 "사시 합격생 수에서 경쟁 대학을 앞서기 위해 학교측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고시반 지원에 대해 일부 학생들이 반발하기도 하지만 합격자 수가 곧 대학의 서열로 여겨지는 풍토에서 불가피한 선택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시반 운영의 원조격인 한양대는 사시, 행시, 회계사반 등 800여명 규모의 고시반을 운영하며 무료특강과 기숙사, 장학금 제공의 혜택을 주고 있다. 이 대학이 각 고시반에 투자하는 예산은 비공식 예산까지 합해 1억∼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고시반 관계자는 "최근엔 공개예산을 늘리는 대신 유명 족집게 강사를 데려오거나 시설을 확충하는 등 물밑지원을 확대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실제 신림동의 한 유명 고시학원 관계자는 "올해 들어 명문대에서 우리 학원강사에게 비밀 특강을 부탁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화여대의 경우 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을 위한 156명 규모의 고시반과 행정외무고시, 공인회계사, 언론고시반 등을 운영중인데 취업난과 겹쳐 입실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법대생이 아닌 일반학과 학생들이 이용하는 사회과학대 고시반은 올해 예년보다 높은 4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숙명여대도 사법, 행정, 외무고시 및 변리사 준비반인 '수정당'과 회계사준비반인 '숙지원'을 운영중이다.
1,000여명 규모의 고시반을 운영중인 고려대 입학관리처 관계자는 "고졸자가 대학 정원을 밑도는 '정원 역전' 시대에 국가고시 합격자수는 신입생 유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어 대학들마다 고시반 지원예산을 확대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이들 대학외에도 고시반 지원체제를 갖춘 대학들은 서강대, 성균관대, 한국외국어대, 동국대, 경희대 등이 있으며 일부 지방대학들은 신림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특별장학금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경영학과 신동엽 교수는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학생들이 안정성이 높은 국가고시에 몰리는 것은 이해하지만 학교 당국마저 '고시 합격생수=대학서열'이라는 인식을 갖고 이에 편승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기초학문의 공동화 현상은 물론 '고시 지상주의'를 더욱 부추기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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