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20일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재임 1929∼1933)을 지낸 허버트 클라크 후버가 90세로 작고했다.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대통령이 된 후버는 재임 중 경제 불황의 타계를 정책 1순위에 놓았지만 그리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재임 중의 후버 모라토리움과 퇴임 뒤의 후버위원회에 새겨져 역사에 남았다.후버 모라토리움은 대공황의 물결에 휘말려 혼란에 빠진 세계 금융질서에 대처하기 위해 후버가 제안한 지급 유예를 가리킨다. 각국 정부가 전채(戰債)와 배상 등의 지급을 서로 1년 간 유예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도 외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이행해야 할 채무 지급을 한 해 동안 유예하겠다는 것이 이 제안의 골자였다. 후버 모라토리움은 1931년 7월 각국 정부의 동의 아래 시행됐지만, 제1차 세계대전 처리 과정에서 골칫거리가 된 전채·배상 문제의 돌파구가 되지는 못했다. 후버위원회는 퇴임 뒤의 후버가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요청으로 주재한 두 차례의 행정기구위원회다. 1947년 민주·공화 양당을 대표하는 12명의 위원으로 출발한 제1차 후버위원회는 두 해 동안의 조사 끝에 행정 기구의 간소화·일원화와 국무성의 조직 강화를 골자로 한 개혁안을 내놓았고, 이 안은 1952년 행정부 재편성법으로 실현됐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활동한 제2차 후버위원회도 연방정부 기구의 합리적 개편과 정착에 이바지했다.
후버라는 성을 지닌 미국인 가운데 정작 오늘의 주인공보다도 훨씬 크고 길게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에드거 후버(1895∼1972)일 것이다. 에드거 후버는 1924년부터 죽을 때까지 무려 48년 동안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있으면서 미국 사회의 '공적'(公敵)들을 가차없이 소탕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