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플라스틱 통을 꺼내 열어 보니 그 많던 된장이 이제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5년 전 통에 가득 담겨 있던 된장이 드디어 얼마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리 꺼내 먹어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던 된장이 절반을 소비하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자신의 나이와 비례한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먹거리 하나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된장은 이제는 고인이 된 어머니가 집에서 직접 메주를 쑤어 손수 담근 것이다. 어머니의 먹거리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장독대의 간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장은 오래 묵을수록 맛이 나는 게야"라며 장독에 장을 담아 오래도록 묵혔다.
어머니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메주를 쑤어서 된장을 담갔다. 자식들과 아파트 생활을 함께 하면서도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항아리를 이사할 때마다 갖고 다녔다.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새우젖 항아리는 이제 현관의 신발장 우산꽂이로 용도가 바뀌었다.
어린 시절 된장 독을 열었다가 표면에 하얀 가시(구더기)가 낀 것을 보고는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냄새도 싫었다. 언젠가는 된장 독에서 통통하게 살이 찐 커다란 구더기를 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구더기를 막기 위해 항아리 입구를 망사로 단단히 둘러쌌다. 그렇지만 효과가 없었다. 알고 보니 파리가 망사에 앉아 낳은 알이 구멍사이로 떨어져 구더기가 생기게 마련이다.
어머니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예전처럼 된장, 고추장을 많이 담그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 된장, 고추장 항아리를 열어보곤 흐뭇해 했다. 마치 아이들이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보고 또 보는 것 같았다.
그 해에도 어머니는 된장을 담가 베란다에 두었다. 된장이 어느 정도 숙성해지자 플라스틱 통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의 된장을 5년이나 먹었다.
오랫동안 식구들의 입맛을 돋궈주었던 된장이 떨어져간다. 이제 얼마 뒤면 어머니의 손 맛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허전함이 밀려온다. 어머니,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simon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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