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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8>시인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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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78>시인 이시영

입력
2003.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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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향에 가면 꼭 걷고 싶은 길이 있다. 내가 나의 시 '마음의 고향 4―가지 않은 길'에서 묘사한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에서의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이다. 마을 서쪽 외침이 쪽으로 가다가 방아다리를 지나 웃냇가 가는 길을 버리고 보(洑)를 지나 아랫냇가를 훌쩍 건너 약간의 경사진 언덕(등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지게를 받쳐놓고 쉬었다)을 오르면 그곳이다. 여름이면 다래를 머금은 목화밭이 길게 펼쳐져 있고 가을이면 키 큰 수수들이 바람에 서걱이는 곳. 화엄사 계곡에서 흘러온 냇물이 곧잘 언덕을 들이받아 벌겋게 황토가 드러난 곳. 나는 밭 매는 어머니를 따라가 그 아랫냇가에서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고 해 저물면 송아지를 거느린 일소들이 '핑경'을 딸랑이며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그러나 이번에 고향에 가보니 아래냇가, 웃냇가는 물론 그 '가름젱이'[다른 이름으로 가는정(細音坪)으로 불리기도 함.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참조]마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대신 반듯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아랫냇가 징검다리가 놓였을 법한 자리엔 거대한 송전탑이, 그리고 그 옆으론 사도리 갑문(閘門)이 서 있었다. 갑문 아래로 수로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는데 흐르는 물인지 고여 있는 물인지 분간이 안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새 우거진 그 속에 백로들이 돌아와 살고 있었다는 것. 나는 그 새들이 돌아온 조상들의 넋인 양 반가웠다. 나는 아무도 걷지 않는 볼품 없는 긴 둑길을 걸어 화엄사 입구까지 가보았다. 거기에 비로소 흐름을 멈춘 계곡이 남겨져 있었다. 이로써 나는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황전리 계곡, 중마리, 가랑리 그리고 광평리를 지나 사도리 앞 들을 가로지르며 옥이교(玉只橋)에서 한번 숨결을 모았다가 용두리에서 다급히 터뜨리며 섬진강에 합류하던 긴 내 하나를 지도상에서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는정' 혹은 '가름젱이'라는 아름다운 지명(地名) 하나도.

아, 그러나 눈 감으면 지금도 보인다. 들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며 때로는 큰 바위를 타 넘으며 콸콸거리고 때로는 잔잔하게 굽이돌며 푸른 소를 만들고 때로는 자갈돌 위를 요란하게 소리내며 흐르던 내. 큰 비가 와 계곡물이 불어나면 학교 수업을 일찍 파하고 나와 동네에서 온 장정들의 등에 업혀 간신히 건너던 내. 그 내의 정식 이름은, 내가 가진 19세기 후반 '구례현지도'(채색필사본, 105.0갽67.0㎝)에 의하면 장일천[長섳川, 요즘의 딱딱한 행정구역 명칭상으로는 그냥 마산천(馬山川)이라고 하며 내가 지나는 마을 이름을 따 황둠내(黃屯川), 광평천, 옥이내라는 구수한 이름으로도 불림. '한국지명총람' 참조]이다. 그러나 그런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저 웃냇가 아랫냇가에서 사시장철 즐거웠으며 바로 그 소년들의 즐거운 함성 속에 장일천은 비로소 구체적 형상을 갖고 우리 앞에 생생히 살아나는 것이다. 사람들의 추억이 묻어 있지 않는 지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니 무슨 울림이 있겠는가. 나는 나와 함께 아무것도 공유할 게 없는 관광지 화엄사 계곡에 쭈그리고 앉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 가서 잃어버린 소년들의 함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디 가서 들판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흐르던 장일천을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나는 그곳을 이렇게 한번 더 노래한 적이 있다.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곳을 지나다녔지/ 수수알이 꽝꽝 여무는 가을이었을까/ 깨꽃이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밝은 여름날이었을까/ 아랫냇가 굽이치던 물길이 옆구리를 들이받아/ 벌건 황토가 드러난 그곳/ 허리 굵은 논실댁과 그의 딸 영자 영숙이 순임이가/ 밭 사이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커다란 웃음들을 웃고/ 나 그 아래 냇가에 소 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갑자기 무섬증이 들어 언덕 위로 달려오르면/ 들꽃 싸아한 향기 속에 두런두런 논실댁의 목소리와/ 까르르 까르르 밭 가장자리로 울려퍼지던/ 영자 영숙이 순임이의 청랑한 웃음 소리/ 나 그곳에 오래 앉아/ 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소를 몰고 돌아오다가/ 혹은 객지로 나가다가 들어오다가/ 무엇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나 오래 그곳에 서 있곤 했다'

<'마음의 고향 2―그 언덕'>

2.시인 정현종은 어느 시에서 말하기를, 구례 천은사에서 화엄사로 가는 길목에서 듣는 기적소리가 가장 은은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다운 기적소리는 늦가을 저물녘 빈들에서 듣는 기적소리다. 길가의 가로수들도 잎이 다 떨어지고 대추머리의 무밭도 다 거두어들이고 삐끄덕 삐끄덕 마차바퀴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하교길의 신작로에서 듣는 전라선 구례구역을 지나는 조용한 기적소리. 그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미어지고 걸음이 빨라지며 한없이 슬퍼졌다. 아니 어디로 떠나고 싶어졌다. 멀리 마을에 저녁 연기 오르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들은 완벽한 빈 들. 마을은 노란 초가지붕들로 새로 단장했건만 누나들과 형님들의 가출이 시작되는 건 이 무렵이었다. 저녁이면 구례구역 낮은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 옷보따리를 안은 흰 저고리 검은 치마의 누나들이, 그리고 어색한 양복 차림의 형님들이 득시글거렸다. 쉽게 얘기하면 '도시바람'이 난 것이고 좀 다르게 표현하면 젊은 농촌 인구의 이농이 막 시작된 것이었다. 내 시 속의 '정님이'나 '후꾸도'도 다 그렇게 고향을 떴다. 그리고 우리의 농촌 공동체는 1970년대 초엽부터 급격히 붕괴되고 만다. 하여간 들은 완벽한 빈 들. 서리라도 내리면 더욱 쓸쓸했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힌 신작로를 걷는 일이란 또 얼마나 팍팍했던가. 지용의 시에 그런 구절이 있다.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먼 항구로 떠도는 구름.' 이 시의 정서는 오래 전에 이미 고향을 떠나 근대의 수많은 항구를 거쳐온 자의 그것이지만, 하여튼 중3짜리 나의 마음도 '제 고향 지니지 않고' 이미 '머언 항구로 떠도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마음, 고향과 갈라서고 싶은 마음에서 근대의 시가 싹트는 것이 아닌가. 고향과 도회가 충돌하고 신작로와 소롯길이 갈리고 옛 시간과 새 시간이 부딪히는 곳으로부터. 생각해보면 나의 시는 너무 오래 고향의 질곡에 묶여 왔다. 근대의 세련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늘 머언 항구로 떠도는 사람이다. 머무는 곳은 질곡! 다시 한번 중3짜리 소년이 되어 신작로를 걷고 싶다. 아니 그 길을 아예 버리고 시끄러운 도회로 나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기차를 타야 되리라. 전라선 구례구역에서, 이제는 근대의 수많은 항구를 경험한 성숙한 시민이 되어.

● 약력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197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수' 당선·'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채탄' 등 2편 당선 등단

창작과비평사 주간, 부사장 등 역임·중앙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시집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가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산문집 '곧 수풀을 베어지리라' 등

정지용문학상(1996) 동서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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