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만에 다시 찾았다. 전남 장흥에는 2개의 유명한 산이 있다. 봄 철쭉으로 유명한 제암산과 가을 억새가 눈부신 천관산이다. 봄에 철쭉을 보기 위해 제암산을 찾았을 때 천관산에도 올랐다. 겨울 바람에 바짝 마른 억새의 줄기만 있었다. 그러나 정상의 너른 평원에 섰을 때 그 광경이 워낙 인상적이서 '억새꽃이 피는 가을에는 이 평원이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산행의 출발 지점인 관산읍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친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희한하게 생긴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밋밋한 능선에 돌기 같은 것이 솟아 있다. 이빨이 적당히 빠진 톱 같다. 호남의 봉우리들은 대부분 돌봉우리이다. 그 중에서도 천관산의 봉우리는 가슴을 서늘하게 할 만큼 강인하게 생겼다.
천관산은 해발 723m의 낮은 산이다. 그러나 거의 해발 0m에서 올라야 하기 때문에 산행의 강도는 만만치 않다.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 산이다. 옛날에는 지제산이라 불렸다. 천관보살이 살고 있다고 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가끔 하얀 연기처럼 서리가 내려 신산이라고도 한다. 전남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인근 중고생들의 단골 소풍산행지로 꼽힐 만큼 사랑을 받는 산이다.
등산로 입구에 팔각정이 있다. 길은 이 곳에서 3개로 나뉜다. 천관산은 발가락이 다섯개인 새의 발처럼 생겼다. 굵은 능선이 다섯개라는 의미이다. 이 능선마다 등산로가 있다. 어디로 올라도 상관이 없다. 3개의 길은 산의 앞에, 2개의 길은 반대편에 있다. 사람들이 애용하는 코스는 팔각정 왼쪽 길로 들어서서 직선으로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올랐다가 주능선을 거쳐 팔각정 오른쪽 길로 내려오는 것이다. 반대로 길을 잡았다.
등산로 입구에 체육공원이 있고 오른쪽으로 오르막길이 보인다. 이 길로 작은 능선을 넘고 개울을 건너면 본격적인 산길이다. 처음에는 지루하다. 오르막 숲길을 그냥 오를 뿐이다. 7부 능선에 이르면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한마디로 눈이 부시다. 짐승의 이빨 같은 바위 능선이 이어진다. 길도 돌길로 바뀐다. 이빨 사이 사이를 돌아 오르는 돌산행이다.
바위가 미끄럽지는 않지만 옆으로 펼쳐지는 다른 돌능선에 한눈을 팔다 보면 헛디딜 수도 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멀리서 바라보면 우뚝 솟은 바위들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평평하다. 돌침대가 따로 없다. 배낭을 벗고 돌침대에 편안하게 눕거나 엎드려 주위를 감상한다. 가을 햇살이 따갑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잠이 솔솔 올 정도이다.
주능선의 입구는 환희대이다. 역시 돌침대처럼 편안한 바위 봉우리이다. 이 곳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면 누구나 한없는 기쁨을 느낀다고 해서 이름이 환희대이다. 환희대에 앉아 주능선을 바라본다. 모습이 또 다르다.
산 아래에서 바라볼 때 희끗희끗하기만 했던 주능선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 억새다. 산 남쪽 능선이 완전히 억새밭이다. 13일 현재 80% 정도 피었다. 마침 남쪽으로 기울어지는 햇살을 받아 은가루처럼 빛난다. 억새꽃은 환희대에서 정상인 연화대까지 약 500m 구간에 밀집해 있다. 키가 적당하다. 어른의 어깨 정도까지 올 정도이다. 너무 키가 크면 사람이 억새밭에 파묻혀 파도처럼 흔들리는 억새의 군무(群舞)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화대까지 가는 너른 평원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상의 연화대는 횃불을 피우던 곳이다. 인근의 섬들과 연락을 취하던 요충지였다. 지금은 기단만 남아있다. 기단에 오른다. 또 다른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바다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단순한 바다가 아니다. 오른쪽으로는 강진만이, 왼쪽으로는 고흥반도가 있다. 수많은 섬들이 그 사이에 박혀 있다. 눈이 호강을 한다.
가을 소풍을 온 중학생이 촬영 장비를 둘러맨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날을 잘못 잡으셨네요잉." 무슨 소리, 이렇게 화창한데. "날이 정말 좋으면 한라산까지 보이는데잉." 한마디 대꾸를 한다. "그건 욕심이제."
/천관산(장흥)=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 천관산 여행법
장흥으로 쉽게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목포까지 간 다음, 2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면 강진을 거쳐 장흥에 닿는다. 2번 국도의 이 구간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길 잃을 염려가 없다. 장흥읍에서 관산으로 길을 잡고 약 20분 달리면 천관산이 보인다. 서울에서 장흥읍까지 하루 3차례 고속버스가 왕복한다. 서울에서 광주로 가면 오히려 편하다. 광주-장흥간 시외직통버스가 하루 25회 왕복한다. 장흥공용터미널 (061)863-9036.
천관산 입구에는 숙소가 부족해 장흥읍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것이 좋다. 장흥관광호텔(061-864-7777), 그랜드파크모텔(863-0042), 한솔모텔(862-8336), 샛별모텔(863-6788) 등 장흥읍 건산리 일대에 장급 여관이 밀집해있다.
장흥에는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도 있다. 해산물이 싱싱하고 맛있다. 바지락회가 유명하다. 미나리와 식초로 상큼한 맛을 낸 바지락회는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풍부한 음식. 특히 식욕 회복에 좋다. 안양면 수문리의 바다하우스(061-862-1021) 등이 전문으로 한다. 남도 먹거리의 얼굴인 한정식을 빼놓을 수 없다. 장흥군청 옆의 신녹회관(863-6622)이 유명하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나온다. 읍내의 취락식당(863-9336)은 소 등심을 파는 집. 키조개, 새조개를 함께 굽는 이른바 '삼합구이'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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