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로 옮긴 첫해 농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유기농이었지만 큰 걱정은 안됐다. 이전 주인인 오영환씨가 목장을 했기 때문에 가축의 분뇨가 적당히 땅에 섞여 토양이 비옥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 8명이서 4만평의 농사를 짓자니 첫해에는 많은 양의 퇴비를 따로 준비할 겨를도 없었다.4만평의 농장은 주로 밭이었다. 그래서 첫해부터 감자와 무·배추 등 채소작물을 심었고 가축으로는 부천에서 끌고 온 소 6마리를 키웠다. 첫해부터 아예 농약과 화학비료는 쓰지 않고 유기질 비료를 이용한 유기농법을 실천했다. 유기질 비료는 주로 퇴비였는데 산과 들에서 베어온 풀이나 근처 농장에서 구한 쌀겨에다 축사에서 나온 가축의 분뇨를 섞어 발효시켜 만들었다.
양주로 건너올 때 이미 내 나이 60이 넘었다. 그러나 유기농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집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해가 뜨면 밭에 나가 김을 매고 벌레를 잡았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 채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벌레를 퇴치하려면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유기농법을 전해준 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의 말을 떠올렸다. 고다니 선생은 "유기농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장미 다발을 껴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장미를 껴안을 때마다 장미의 가시가 온몸을 찌르게 됩니다. 그 아픔을 모두 견뎌내야 비로소 장미를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라고 했었다. 유기농을 성공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닥칠 것을 넌지시 알려준 말이었다.
유기농은 원래 순환농법이 제격이다. 전체 농장을 3개로 나누어 하나는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조성하는 초지로 사용하고 또 하나는 가축을 키우는 목장으로 나머지는 목장에서 나오는 각종 퇴비를 사용해 작물을 키우는 밭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가 좁아 토지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 처지에서는 사실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양주에서도 목장은 퇴비를 생산할 정도의 최소규모로 잡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밭으로 돌렸다. 가축에게 먹일 목초는 들과 산에서 베어온 풀이나 밭농사에서 나온 부산물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한 결과는 큰 실패였다. 밤낮으로 벌레를 잡는다고 잡았지만 무와 배추는 온통 벌레구멍 투성이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유기농산물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벌레먹은 채소는 사람도 못 먹을 것으로 취급받을 때였다. 그나마 성한 것을 골라 시장에 내다팔았지만 500만원이라는 큰 손해만 남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의외로 큰 손해 앞에 모두들 의기소침했다. 첫해 막대한 손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기농법을 하겠다고 나선 정농회 회원들은 대부분 손해를 면치 못했다. 회원 가운데는 기가 꺾여 유기농을 포기하고 탈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주변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빈정거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1년 동안 고생한 일들이 떠올랐고 점차 토양이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오기도 생겨났다.
그래서 실패한 그 해 겨울을 앉아서 기다리는 대신 다음해 농사를 위한 준비로 분주히 보냈다. 산성으로 변한 토양을 바꾸는 데 쓸 퇴비를 더 많이 마련하기 위해 우리 농장의 가축분뇨뿐 아니라 인근 목장서 나오는 소 똥과 닭똥을 모조리 긁어 모았다. 유기농법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발효균이 따로 있어 발효가 한결 쉬워졌지만 당시만 해도 가축의 분뇨 이외는 퇴비를 썩힐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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