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제의로 온 나라가 요동 치고 있다. 이 같은 사태를 바라보면서 역시 '노무현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뜻은 복합적이다.우선, 노 대통령이 평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원칙을 지켜온 정치인답게 또 한번 대통령 자리까지도 던질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에 대해 마음이 숙연해진다. 민주당의 개혁적 전국구 의원들조차 마음은 통합신당에 가 있으면서도 몇 달 남지 않은 금뱃지가 아까워 수모를 감수하며 민주당에 머물고 있을 정도로 모두들 자리에 연연하는 한국정치의 풍토를 생각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노 대통령이 역시 경솔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배수진을 친 승부수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도박의 정치'는 여전하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재신임 카드가 잘된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건설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와 관련해 최소한 재신임 때까지 만이라도 노 대통령이 야당과 언론 등을 대상으로 하는 '원망의 정치'를 줄이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성의 정치', '참회의 정치'를 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노 대통령은 이번에 최도술 문제에 대해 죄송하다는 사과를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동안 발목을 잡아왔다고 생각하는 야당, 언론 등을 강하게 원망했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자성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이 어제 국회연설에서는 원망을 줄이고 상당부분을 자기성찰에 할당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재신임 카드가 가진 딜레마이다. 노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재신임을 다른 정책과 연계하지 않고 재신임 자체에 대해 묻겠다고 밝혔다. 이는 떳떳한 정면 승부의 자세로 칭찬할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럴 경우 노 대통령이 희망하듯이 이번 재신임 투표가 한국정치개혁의 기회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단순히 정치인들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는 전례를 남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을 먼저 솔직히 털어놓고 여야 모두 이에 대한 특검을 받도록 한 뒤 사면을 하는 동시에 혁명적인 정치자금 개혁안을 제시해 국민의 의사를 묻는 방식을 통해 이번 재신임을 정치적 부패 청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점에서 노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를 들고 나왔어야 할 시점은 이번이 아니라 정대철 대표의 발언으로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였다.
또 다른 딜레마는 재신임 투표가 실시되어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아도 총선에서 승리를 하지 못하면 지금의 구조적 문제점은 그대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선거까지 많은 변수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추세라면 총선 승리는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보면 노 대통령이 이번 재신임을 사실상 국정장악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헌 등을 통해 야당이 원하는 이원집정부제나 책임총리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대신 선거제도를 그 자신이 주장해온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는 방안을 제시해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중대선거구제가 실시되면 동반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역구도가 약화하고 통합신당이 선전할 것이다. 그러나 중대선거구제는 여러 부작용이 많아 시민사회단체 등이 반대하고 있는데다 한나라당도 끝까지 이에 반대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와 연계해 국민의 의사를 물을 명분이 취약하다는 문제점도 있다.
노 대통령의 12월 국민투표 실시안을 놓고 정치권이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여야 모두가 당리당략을 넘어서 정치자금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의 계기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지혜로운 재신임안을 마련해야 한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