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純御用(고순어용).' 7평 남짓한 필방의 정면 벽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원로서예가 정향(靜香) 조병호(趙炳鎬·90)옹이 구하산방(九霞山房)과 인연을 연 지 60년이 되던 해에 써준 편액은 뜻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두 임금 고종과 순종 부자도 여기서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구입했다는 일화를 편액은 전한다. 그들은 묵향에 기대어 망국의 한을 달래고 국권회복을 염원했는지도 모른다.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인 오세창(吳世昌)의 제자 조옹도 열살 무렵부터 구하산방에 드나들었다. 대전 서구 정림동에 단군사당 단묘를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내온 조옹은 기와무늬그림에 글을 쓰고 전서로 주석을 다는 와당문 서예체의 대가다.
인사동에서도 구하산방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올해로 문을 연지 꼭 90년이다. 구하산방은 종이 붓 먹 벼루의 문방사우를 비롯, 서화재료를 파는 필방이다. 필방은 생산자가 아니다. 장인과 작가를 이어주는 가교다.
이상범 김관호 변관식 김기창 등 내로라 하는 한국화의 대가들은 구하산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구하산방을 모르면 작가가 아니다.' 그런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작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한국화의 성장을 지켜본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렵던 시절 붓 살 돈마저 없던 젊은 작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딛고 화업에 전념, 대가로 성장한 작가도 많습니다. 그런 작은 베품이 평생 인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구하산방의 대표 홍수희(洪洙憙·54)씨가 숙부(洪起大·홍기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하산방이 다루는 서화재료는 1,000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붓의 명가로 더욱 알려져 있다. 일본의 본점은 간판을 내렸어도 서울의 구하산방이 창업 한 세기를 바라보는 비결이다. 예로부터 좋은 붓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든다. 첨(尖) 제(齊) 원(圓) 건(健)의 사덕(四德)이다. 붓끝이 날카롭고 흩어지지 않는 것을 첨, 굽은 털이 없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것을 제라고 한다. 원은 둥근 모양에 회전이 잘 되는 것이며 건은 획이 끊김 없이 이어지고 수명이 길어야 함을 의미한다.
구하산방은 사덕에 작가의 개성을 보탠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붓의 오덕을 추구한다고 할까. 필장(筆匠)에게 그렇게 붓을 매달라고 주문한다. 당연히 작가마다 지닌 독특한 화풍과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하산방의 전통이 그런 작업이 가능하도록 이끈 것도 사실일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붓이 다릅니다. 예컨대 박노수 서세옥화백 같은 분들은 학다리처럼 쭉 뻗은 붓을 좋아합니다. 이른바 힘이 있는 붓이죠. 아무리 사용해도 털이 변하지 않고 곧바로 원래의 모양을 회복합니다." 홍씨는 그러면서 채색, 산수, 사군자 등 용도를 떠나 글씨가 잘 써지는 붓을 상품으로 여긴다고 덧붙인다.
구하산방이 자랑하는 붓은 세광봉백학필(細光鋒白鶴筆). 그 맛과 멋을 말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한 자루에 최소 40만원 이상 한다. 죽필(竹筆)은 임진왜란 이후 제작기법이 거의 끊긴 명품이다. 대나무를 머리카락처럼 잘게 갈라 만드는데 이젠 일본산이 최고다. 붓을 한 자루 매는데 무려 120번의 손질이 필요하다. 필장의 혼이 배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붓이 탄생할 수 없다.
"구하산방의 서화재료는 한국에서 제일 비쌉니다." 홍씨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품질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구하산은 신선만이 산다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산이다. 신선들이 이용하는 필방이니 그에 걸맞은 재료만 취급하는 것일까.
구하산방은 1913년 진고개에서 출발했다. 일본에 있던 같은 이름의 필방이 서울에 지점을 낸 것이다. 광복을 맞아 주인이 바뀐다. 한국인지배인 홍기대씨가 인수한 것이다. 골동품과 고서화 감정에 뛰어난 안목을 지닌 홍기대씨는 그 분야의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필방을 조카에게 물려준다. 직장에 다니던 홍수희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형으로부터 87년 필방의 운영을 넘겨받았다.
구하산방은 일제강점기 만주 등에 서화재료를 수출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값싼 중국의 서화재료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산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심지어 서화용 종이는 80% 이상을 중국산이 차지한다.
"이러다간 많은 전통문화상품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붓 먹 벼루의 경우 장인의 수가 크게 줄고 있습니다. 노력에 비해 소득이 시원찮으니 당연한 거죠. 그나마 그런 기능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더욱 찾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문화상품은 공산품과는 의미가 다르다. 우리 전통과 정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상품을 만드는 장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 것은 홍씨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전통의 脈 끊길 위기"
종이(紙·지) 붓(筆·필) 먹(墨·묵) 벼루(硯·연)의 문방사우는 하나만 빠져도 제 기능을 잃는다. 먹이 없는 벼루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벼루에 먹을 갈고 붓에 먹을 찍더라도 종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전통문화의 원천이 돼온 문방사우는 그러나 컴퓨터에 자리를 내주면서 점차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한 종이와 달리 붓과 먹, 그리고 벼루는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지만 언제 전통의 맥이 끊어질지 모른다.
붓은 전남 함평과 광주 백운동에서 나오는 진다리붓을 명품으로 꼽는다. 진다리붓의 장인 안종선씨는 고인이 됐고 아들들이 가업을 잇고 있다. 진다리는 백운동의 옛 지명인데 안종선씨의 조부가 이곳에 정착, 붓을 매면서 명품의 이름을 얻게 됐다. 진다리붓 장인들은 일반 붓 뿐만 아니라 칡붓 닭털붓 등 휘귀한 전통붓의 재현에도 노력하고 있다.
붓의 털은 주로 족제비(황모·黃毛) 다람쥐(청모·靑毛) 노루겨드랑이(장액·獐腋) 염소(양모·羊毛)에서 채취한다.
국내에서는 족제비 털을 가장 많이 쓴다. 광복 전만해도 족제비를 필방에 갖다 주면 붓을 맨 뒤 주인과 제공자가 값을 반씩 나눠 가졌다고 한다.
서수필(鼠鬚筆)은 쥐의 수염으로 만든 붓인데 중국의 왕휘지(王羲之)가 애용했다. 쥐 한 마리에서 채취 가능한 수염은 8개 정도로 붓 한 자루 매는 데 200마리의 쥐가 필요하다. 붓의 종류는 호의 길이, 굵기, 강도에 따라 수없이 많다. 성균관대에 소장된 김규진(金圭鎭)의 붓은 길이가 약 2m, 죽봉이 30cm에 달하는 대필이다.
먹은 송연묵(松煙墨)과 유연묵(油煙墨)의 두 종류가 있다.
송연묵은 소나무의 그을음, 유연묵은 기름의 그을음이 원료다. 그윽한 시정을 표현하는 묵향은 바로 먹의 신비로운 향내다. 송연묵은 소나무의 짙은 내음을 간직해 묵향이 짙다. 전통 먹으로는 묵장 주봉인씨가 만드는 울산의 태화먹과 서울의 만수무강먹이 있다. 일본의 정창원에는 옛 먹 14 자루가 보존돼 있는데 두 자루는 고구려의 스님 담징(曇徵)이 종이제조법과 함께 전한 신라먹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산오옥'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먹이다. 그나마 먹은 중국산이 국내에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한다. 중국산은 건조한 날씨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국내에 들어오면 갈라지는 결함을 갖고 있다.
벼루는 충남 보령시 성주산의 백운상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장인 김진한씨가 만들고 있는 이 벼루는 검정바탕에 흰 구름 무늬가 앉아 있는데 먹을 갈아놓으면 한 달이나 간다. 보물로 지정된 김정희(金正喜)의 벼루 3점중 하나는 바로 백운상석이다.
중국 광둥성(廣東省) 단계(端溪)에서 나오는 단계연을 천하제일로 평가한다. 당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단계연은 숱한 위조품이 나돌았다. 분단되기 전까지 평북 위원(渭原)에서 출산된 벼루도 품질이 뛰어나 위원단계연으로 불렸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벼루는 약랑연(藥浪硯)으로 일제강점기 낙랑고분에서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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