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의 풀무원공동체는 초보적인 실험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의지할 곳 없는 이라도 개인의 노력만 있으면 굶주림을 해결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더 큰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했다.유기농은 이런 딜렘마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건강한 농산물을 소비자들과 공유하자는 이웃사랑의 뜻이 유기농의 실천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천 공동체에서는 나와 내가 보살피는 공동체 가족이 굶지않고 사는 것이 당면목표였다면 유기농을 접한 뒤로는 '공동체 울타리 밖의 사람들까지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데까지 목표가 넓어졌다. 그러기 위해선 농사의 틀도 바꾸고 공동체도 조직적으로 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부천에서 유기농을 접하면서부터 이런 고민에 빠진 나는 양주로 공동체를 옮기자마자 조직을 새로 꾸리는 데 착수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던 이전 공동체의 목표와 달리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면서 건강한 농작물은 함께 나누자'는 새로운 목표를 담기 위해서는 뭔가 혁신적인 조직이 필요했다.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해서는 안 되는데 그럼 조직은 어떤 모습이 돼야 하나?
유기농을 실천하는 생활공동체 '한삶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한삶회라는 명칭은 공동체의 순우리말 표현이기도 하지만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나누자'는 공동체 목표를 한꺼번에 담고있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한삶회는 먼저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것네것'을 구별하는 데서 범죄나 기아 등 제반 사회문제들이 싹틀 뿐 아니라 하나님도 '양식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으라'고 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만을 소유하고 나눌 준비가 된 사람만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나부터 개인소유의 욕심을 버렸다. 공동체 터전으로 마련한 4만평의 양주 농장을 한삶회의 기초자산으로 내놓았다.
양주에서도 농장의 명칭은 그대로 풀무원농장이었지만 농장을 중심으로 뭉친 생활공동체는 법인 형태의 한삶회로 바뀌었다. 그래서 회원의 자격이나 농장의 운영 및 자산에 관한 사항은 모두 엄격한 규정에 따랐다. 회원은 3년간의 훈련기간을 거친 사람에 한해서 뽑았는데 최초의 1년간 시험기간을 거칠 때도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신앙을 성실히 탐구하고 술·담배를 절대로 하지 않으며 거짓과 개인적인 비밀을 갖기 않으며 사유재산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훈련기간을 마치고 회원이 되면 농장운영에 관한 의결권을 가질 수 있었다.
훈련기간은 물론이고 회원이 되더라도 개인적 사생활은 허락되지 않았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물론 교육비나 교통비 등 개인 생활비도 공동지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월말이나 연말결산을 통해 남는 것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도 공동체 규약에 포함됐다. 농사를 지을만한 땅과 살 집, 추수 때까지의 양식으로 제한한 '일용할 양식'이외에는 나누자는 게 새로운 공동체의 설립취지였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점차 체계를 잡아가면서 한삶회는 회원이 50명까지 늘어난 적도 있다. 공동체에 들어와 회원으로 가입하는 이들은 생활이 어려워 오갈 데 없는 사람부터 신앙을 목표로 하는 사람, 유기농에 뜻을 둔 사람 등 여러가지 부류였다.
한삶회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계에서 농장을 다녀갔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종교단체나 학원 등에서도 2∼3일 일정으로 농장을 방문해 직접 체험학습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현장견학을 마친 단체에서는 원조를 제의하는 곳도 적지 않았지만 나는 한번도 도움의 손길에 기대지 않았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신적 자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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