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가 막 끝난 지난 달 16일 밤 중견 건설업체 동보주택건설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이 회사 정동기(32) 대리의 부인이 예정일이 훨씬 지나도록 출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영숙(60) 사장이 출산 경험이 있는 채순석(41) 부장과 함께 '휴대폰 출산 지휘'에 나섰다. 정 대리 부부가 고향에서 상경해 단둘이 지내고 있는데다 초산이어서 경황이 없자 조 사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조산원'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조 사장은 이날 밤 늦도록 채 부장을 통해 산모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은 뒤 정 대리에게 "출산할 때까지 부인 옆을 지키지 않고 출근하면 자른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현준(44) 상무에게는 적당한 병원을 물색해 산모를 옮기라고 지시했다.
9월 17일 무사히 득녀한 정 대리는 "아이가 태변을 먹어서 상태가 안좋았다는데 선배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혼쭐날 뻔했다"며 "처형이 회사의 '극성'에 탄복하더라"고 말했다.
이른바 '노가다' 문화가 뿌리깊이 박혀 거칠기만 할 것 같은 건설업체의 사내 분위기가 이렇다니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질 법하다. 그러나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연 그렇구나"라며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미혼의 조 사장을 필두로 창업 멤버 채 부장, 총무부 류혜숙(35) 차장, 최희승(31) 기획실장 등 관리 파트 임원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들은 사무실에 다소곳이 앉아 공사 현장의 상황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출장을 가서는 설계, 시공, 분양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꼼꼼히 챙기는 건설업계의 이름 난 여장부들.
'건설판'에서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아 남겠다는 프로 근성도 남 다르지만 아줌마들끼리의 '우정'이 이들을 '만능 우먼'으로 변신시켰다. 동료가 공사현장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면 본사에 남아있는 직원 몇몇이 반드시 그곳으로 무박 2일 일정의 마실을 다녀오는 것이 관행이 돼, 보고 듣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옆자리 친구가 한동안 안보이면 보고 싶잖아요." 이들의 지방 마실의 변(辯)이다.
5월에는 강원 원주시 단구동의 주상복합 '노빌리티 타워' 분양사무소에 장기 출장을 떠난 후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채 부장, 류 차장, 최재언(36) 대리가 합류했다가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세 '아줌마'는 분양 포스터 정리를 마친 뒤 장을 보고 와서는 밤 늦도록 후배들과 맥주를 마시며 '노는데' 최 대리 휴대폰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한마디는 "나 영숙이". 최 대리는 동명의 동료인 줄 알고 "영숙아, 너도 여기 와서 같이 놀자"고 간단히 대답했는데 상대방은 다름 아닌 조 사장이었다. 밤 늦은 시간에 걸려온 사장의 전화에 대한 류 차장의 분석은 이렇다. "사장님도 우리가 떼 지어 내려갔다니까 같이 놀고 싶으셨나 보죠."
조 사장은 "우리 '아이'들은 멀티 플레이어"라며 "본사 직원이 38명밖에 안되다 보니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참석'하느라 모두들 건설 박사가 됐다"고 자랑했다. 정 대리 부부의 안전한 출산, 지방 현장 마실 등이 바로 이 참석의 전통이 빚은 작품들이다.
동보주택의 또 다른 전통은 '만혼(晩婚)'. 조 사장이 농반 진반으로 "니들 순번지켜서 결혼해라"는 엄포성 말이 씨가 됐는지 제때에 결혼한 여직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 사장은 아예 미혼이고, 채 부장은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30세에, 류 차장은 33세에 면사포를 썼다.
조 사장은 "우리 아이들이 결혼 안 하는 사장의 눈치를 봤다기 보다는 스스로 일을 즐기며 몰두하다 보니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핑계를 댔지만 집안 일과 회사 일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주부 사원을 위해 꼼꼼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여직원의 시부모를 위해 철마다 보약을 챙겨줄 뿐 아니라 노인들은 위한 좋은 물건이 눈에 띄면 한아름 사들고 와서는 나눠주곤 한다.
조 사장의 '자식' 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직원들을 해고하기는커녕 월급 한푼 깎지 않았다. 1990년부터 시작한 '매년 해외여행' 약속도 빠짐없이 지켜오고 있다. 속옷 선물을 많이 하다 보니 직원 38명의 속옷 사이즈와 취향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을 정도.
조 사장은 "남의 돈 빌리지 않고 튼튼하고 실용적인 주택을 짓는다는 회사의 방침과 아줌마의 기질이 딱 어울리지 않느냐"며 "무리하게 많은 주택을 짓기 보다는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돌볼 수 있을 만큼의 주택만을 만들어서 입주민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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