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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퇴색하지 않은 "386다운 삶" 문화재 지킴이 운동 황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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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퇴색하지 않은 "386다운 삶" 문화재 지킴이 운동 황평우

입력
2003.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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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를 숫자 하나에 가두려 했던 시도 자체가 애당초 난센스였다. 베이비붐 세대니 X, 혹은 N세대 등의 명칭에는 세월의 흐름을 넘어 해당세대를 규정짓는 개략적 특징이 내포돼 있다. 하지만 '386세대'란 건 뭔가. 몰개성적이고 비문화적인 이 호칭은 생겨난 지 불과 4∼5년 만에 폐기될 위기에 처해있다. 대상집단의 상당수가 40대에 접어들어 첫 숫자부터가 어색해졌고, 그 세대의 참신성과 우월성(아마도 도덕적이고 개혁적인 측면에서)을 겹쳐 상징했던 386컴퓨터도 수명을 다한 골동품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세대정신을 독점한 양 의기양양하게 정치권 등으로 진입한 386 태반이 그들이 비난했던 세대와 별반 다르지않은 행태들을 보이고 있음에랴.그러나 기대를 아예 거둘 일은 아니다. 원래의 '386다움'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까. 별 물질적 이득도 없는 문화재 지킴이 운동을 꿋꿋하게 펴나가고 있는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황평우(黃平雨·42)씨도 그런 사람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합리적인 시민의 힘에 대한 신뢰'야말로 전 세대와 뚜렷이 구별되는 386세대의 정신 아니던가.

황평우씨는 여러가지로 매우 골치아픈 사람이다. 특히 문화재 관련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나, 문화재 주변에서 어떡해서든 장사 좀 해보려는 이들에게는. 그래서 그는 칭찬보다는 늘 욕을 듣는데 익숙하다. 오죽하면 완고하고 '점잖은' 그 바닥에서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않는 싸움개"의 명성을 얻었을까. 그러고 보니 사람 좋아보이는 그의 둥글둥글한 얼굴 뒤에 간단치 않은 맷집이 엿보인다.

이력을 소개하기 전에 우선 그의 뚝심을 보여주는 사례 한가지. 재작년 황씨는 '문화재 보수면허 대여'를 문제 삼았다. 엄격한 자격검증을 거쳐 발급되는 문화재 보수면허가 무자격 건축업자 등에게 2,000∼3,000만원에 마구 대여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 (가령 경복궁 전각하나 보수하는 예산이 300억원 가까이 되기도 하니 어마어마한 이권이다) 무면허 의사의 시술이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듯 이건 자칫 귀중한 문화유산을 영원히 불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끔찍한 일이었다.

심상치 않은 '경고사인'을 무시한 채 은밀하고 배타적인 이 바닥의 커넥션을 끈질기게 파고든 그는 마침내 TV 저녁 뉴스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관련업계가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꼴이 된 것은 당연. "목에 칼침 놓겠다"는 섬뜩한 전화와 메시지가 연일 날아들었다. 밤에 동네 주차장에서부터 휴대폰의 112 번호를 눌러놓은 뒤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채 150여m 떨어진 집까지 서늘한 뒷골로 종종걸음을 치는 날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각계에 걸친 설득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올해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선언적 내용 뿐이던 보수면허 대여금지 규정에 구체적인 처벌조항이 삽입됐다.

황씨는 전형적인 80년대 운동권 학생이었다. 고려대 공대에 82학번으로 입학했으나 제적, 강제징집, 구속, 집행유예 등의 온갖 우여곡절(물론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한 때문이다)을 겪은 끝에 88년 보건대학에서 간신히 학업을 마쳤다. 이런 경력으로 취직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번번이 기업 면접에서 퇴짜를 맡은 끝에 "그래, 그냥 운동 속에 있자"며 당시 재야운동세력의 총연합체이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몸을 담았다. 그러면서 삼선교에 사회과학전문서점 '한백서원'을 열었다. 말이 전문서점이지, 당국이 보기에는 운동권의 모든 자료들까지 취급하는 '불온서점'이었다. "선배가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느냐'며 2,000만원을 빌려줘 연 책방이었어요. 그런데 장사가 될 리가 있었겠어요? 인근 성북서 형사들이 가장 단골이었으니. 허구헌날 압수수색을 당해 남아날 책이 없을 정도였지요. 결국 2년만에 다 털어 먹었습니다."

'운동'에 지치기도 한 그는 "3년만 돈을 벌겠다"며 현대자동차에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딱 한번 뿐인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운동을 하며 넓힌 지면(知面)에다 넉살좋은 성격 때문이었을까. 그는 불과 반년 만에 70대 가까운 차를 팔아치워 신입사원으로는 경이적인 실적을 올렸다. 연 수입이 7,000∼8,000만원에 달해 입사 3년 만에 거뜬히 집도 마련했다. "그런데 할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고생하는 (운동권)동료, 후배들에게 영 미안했습니다. 내 한 몸의 평안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오래 갈등하던 그는 결국 한창 잘 나가던 과장 때인 재작년 사표를 던졌다.

혼자 살기에는 웬만큼 돈도 있었겠다, 더구나 시간이야. 그는 그 때부터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우리문화 공부에 매달렸다. "어렸을 때부터 웬지 우리 역사나 문화가 특별히 재미있었습니다. 만화가게에서도 다른 아이들이 제쳐두는 최영, 이순신 장군 등의 역사만화만 봤지요." 문화답사팀마다 쫓아 다니고 유홍준(兪弘濬) 교수 등의 강의를 들으며 기초를 다진 그는 10여년 전부터는 혼자 카메라를 들고 폐사지(廢寺址) 등을 답사하며 나름의 안목을 키웠다. (그는 그러면서 인생의 덧없음과 황량함도 많이 느꼈다고 했다) 97년에는 참여연대에 가입하면서 직접 답사팀 '우리'팀을 꾸려 이끌었는가 하면, 그 해부터 대목(大木·큰 목수) 신영훈(申榮勳) 선생에게서 4년간 전문적인 한옥구조이론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거의 모든 문화재관련 학술회의나 강연을 쫓아 다니는 건 지금도 그의 일상이다.

그는 10여년간 치열하게 쌓은 '공력(功力)'을 바탕으로 마침내 초유의 민간 문화재정책연구가로서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그 어렵고 폐쇄적인 문화재 분야에서의 시민 활동가는 처음이었다. 모두(冒頭)의 문화재보수면허 대여건(件)이 바로 그 즈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학계나 관(官)에 아무리 문제제기를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화재 관련 분야는 배타적인 전문성을 무기로, 워낙 단단한 '그들'만의 카르텔이 형성돼 있어 가히 철옹성이지요. 결국 언론과 정치인들을 통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특히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문화재청 국정감사장은 사실상 그의 독무대가 됐다. 문화재 훼손 우려가 있는 궁궐 내 야간촬영 제한,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 내에 만들어진 박정희 정권시대의 벙커 철거 등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의원들의 국감 질의로 이뤄졌다. 올해 국감에서도 한나라당 정병국(鄭炳國) 의원에게 문화재보수공사 입찰비리, 전국 문화재 훼손실태 등 무려 11건 100쪽에 달하는 정책자료집을 직접 만들어 건넸다.

그 뿐이 아니다. 그동안 답사에서 만난 탑, 고고학, 한국건축, 문화재정책 등 분야의 민간 전문가 14명으로 지난해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를 만들었다. "세상은 학자나 관리가 아니라 결국은 시민이 만들어간다"는 게 그 취지. 이 연구소를 통해서도 기록에 있으나 방치된 유물들을 찾아내고, 미공개 자료(올 여름 처음 공개된 순종의 국장·國葬사진 100여장도 그것들 중 하나다)들을 발굴하고, 문화재정책의 문제점들을 꾸준히 제시해오고 있다.

황씨는 여전히 혼자 몸이다.(곧 독신생활을 청산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생활이요? 별로 걱정 안 해요. 29평짜리 연립주택도 있고…. 여기저기 강연료 등으로 최소한의 용돈은 버는데다 기자, 의원 보좌관, 공무원들이 밥도 자주 사지요."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5,000원짜리 이상은 절대로 얻어먹지 않습니다." 이렇게 빠듯하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각종 시민·사회·문화단체 등 20여 곳에 월 50∼60만원에 달하는 회비와 후원비를 내 돕고 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황씨는 앞으로 우리의 대형 문화유산을 노동사(勞動史)적 측면에서 규명해보는 일을 할 계획이다. "문화재의 70%가 건조물입니다. 답사를 하다 보니 그걸 만드느라고 민중들이 얼마나 희생됐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구요. 그런데도 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진 적이 없거든요." 그의 이런 계획 역시 386세대가 공유하는 80년대적 인식이 아니고는 힘든 발상이다.

그는 확실히 낙천가 임에 틀림없다. 자신과 같은 한 구석 시민들의 힘으로도 어느 곳, 어느 분야든 세상을 좀더 낫게 바꾸어갈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래도 알게 모르게 세상 많이 바뀌었어요. 글쎄, 제가 얼마 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의뢰로 생도들에게 문화재 교육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전 시각으로 보자면 저는 좌파 시민운동가 출신이잖아요. 어림도 없던 일이지요."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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